[아주초대석] 이병헌 "'내부자들'에서 맡은 캐릭터가 가장 매력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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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1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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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쇼박스]

아주경제 김은하 기자 = 배우 이병헌이 세상을 들썩거리게 한 ‘50억 협박 사건’ 이후 처음으로 기자와 만났다. 주연작 ‘내부자들’(감독 우민호)을 위해서다. 그 사이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와 전도연과 함께한 ‘협녀, 칼의 기억’이 개봉했지만, 이병헌이 기자 앞에 선 것은 ‘협녀, 칼의 기억’ 제작보고회뿐이었다.

영화 ‘내부자들’은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정치, 경제, 언론, 검찰, 경찰을 정면으로 목도하며 한국 사회에 팽배한 비리와 부패의 근원을 적나라하게 조명한다. ‘미생’ ‘이끼’를 집필한 윤태호 작가의 미완결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이병헌은 펜을 칼처럼 휘두르는 국내 유력 보수지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의 수하, 안상구를 연기했다. 권력자의 충성스러운 개를 자처했지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는 정치 깡패다. 자신을 내친 이들에게 복수를 꿈꾸는 덜떨어지고 미욱한, 여우 같은 곰이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제가 연기해야 할 안상구가 제일 재미없는 캐릭터인 거예요. 사실 입체적이고 복잡한 이강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뭐…제게 허락된 몫은 아니었지만요.”

그도 그럴 것이 시나리오 초안 속 안상구와 스크린 속 안상구는 판이하다. 이병헌은 무겁고 평면적인 안상구에게 새 옷을 입혀보자고 감독에게 제안했다.

“완성도가 뛰어난 윤태호 작가님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데다, 미완결 웹툰을 완성형 영화로 만든다는 것이 재밌게 다가와 꼭 출연하고 싶었죠. 그래서 ‘뭐가 문제일까’ 고민했습니다. ‘현실적 이야기를 질퍽하고,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영화에 뭐하나 덜떨어진 캐릭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관객이 숨 쉴 수 있는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역할을 안상구에게 부여하자고 감독님께 제안했죠. 구체적인 대사까지 바꿀 시간이 없어서 현장에서 낸 아이디어로 안상구를 만들어갔어요. 내가 상상한, 덜떨어진 안상구만 떠올리며 애드리브를 날렸죠. 제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애드리브를 한 작품입니다.”

꼭 웃음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이병헌은 “복수를 꿈꾸는 인물이라고 해서 언제고 광기에 사로잡혀있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내일 당장 복수하는 게 아니라면, 그게 몇 년이 걸리는 일이라면 그동안 그는 밥도 챙겨 먹고 가끔은 웃으면서 살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365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무표정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고민이 쌓여 지금의 안상구가 탄생했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변기에 앉아있다가 엉덩이를 쭉 빼고 뒤뚱거리며 걷더니 화장실 문에 얼굴을 빠끔히 빼고 “소주는 참이슬로~”라고 외치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잔 할려?”라는 말을 날리면서, 뜨거움을 참지 못해 뱉어낸 라면을 다시 입안으로 털어 넣으면서 안상구는 ‘내부자들’의 유일한 숨통이 됐다.
 

[사진 제공=쇼박스]

“언론 시사 전날, 긴장돼 잠도 못잤다”던 그는 완성된 영화를 눈으로 확인한 후 한결 편안해 보였다.

“편집본이 여러 번 바뀌었어요. 특히 캐릭터에 집중한 3시간40분짜리 편집본은 내부 반응이 아주 좋았고요. 그래서 ‘1, 2편으로 나눠 개봉해야하나’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130분으로 반 토막이 난 거죠. 캐틱터를 재밌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장면이 모두 삭제된 이 편집본을 어떻게 받아들여 주실까 걱정 많이 했어요. (조)승우는 ‘시사회에 가야 하나’까지 고민하더라고요. 근데 막상 꺼내보니 ‘곁가지를 걷어낸 큰 줄기의 사건이 스피디하게 전개된다’는 반응이라 다행입니다. 사실 승우랑 걱정 엄청 했거든요.”

‘내부자들’이 지닌 힘은 원작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무대에서 뿜어내던 에너지를 스크린에 그대로 가져온 조승우,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노련함을 자랑하는 백윤식, 잔인함과 인간적 면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이병헌까지…세 배우가 뿜어내는 시너지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귀한 경험이다.

“승우랑 작품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전부터 ‘저 친구 참 좋은 배우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연기해보니까,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뭐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숙한 친구죠. 그 친구가 연기하면 뭐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러워요. 개인적으로 ‘내부자들’은 조승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백윤식 선생님과의 작업은 쉽지 않았어요. 절대 뻔한 연기를 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상대방이 이런 감정으로 리액션을 하겠구나’ 하고 상상을 하는데, 백 선생님은 제 상상대로 리액션 해주는 법이 없죠. ‘당신이 죽였지?’라고 물으면 ‘내가 안 죽였어’하면서 소리 질러줘야 하는데 백 선생님은 숨을 내뱉듯 ‘내가 안 죽였어’라고 읊조리면서 알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을 뿐이죠. 이게 연륜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병헌은 ‘내부자들’의 가능성을 단박에 알아봤다. 출연진 중에 가장 먼저 우민호 감독의 러브콜에 응했다. 이병헌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회성 짙은 작품에 참여해야겠다’라는 거창한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언제나 그랬듯 그저 재미있어서 출연한 것뿐”이라며 “최근 사회비리를 고발하는 영화가 많아졌다. 유행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다. 사회가 그만큼 잘못되었다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사진 제공=쇼박스]

‘50억 협박 사건’ 이후 그를 처음 만난 것이라, 개인적 심경을 묻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불편한 공기가 엄습했지만, 이병헌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논란이 일던 당시 ‘내부자들’ 촬영 중이었습니다. 나 하나로 인해서 작품과 작품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 역할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번의 사과로 쉽게 과거의 저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이나 사생활에서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내년 알 파치노 등과 함께한 ‘미스컨덕트’와 고전을 리메이크한 미국 영화 ‘황야의 7인’ 개봉을 앞둔 그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버텨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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