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즉시 한다. 반드시 한다. 될 때까지 한다.”
김형진 세종그룹 회장이 임직원들, 특히 젊은 직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무엇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창조경제 시대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장 트렌드를 읽는 능력, 변화에 맞서는 경쟁사의 대처를 읽는 정보력, 고객이 원하는 바를 충족하는 서비스정신,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력 그리고 과거보다 우월한 속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나 역시 단 한순간도 어렵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변화와 혁신을 위한 노력을 지속한다면 우리의 생존권은 보장된다"고 말했다. 이어 "남들보다 두 배로 일하고 두 배로 고민하고, 남들보다 두 배로 빨리 목표했던 일을 해결해 지속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창조경제를 이끄는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지금까지 두 번의 인생의 대전환을 이뤄냈다. 1958년 10월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그는 1973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서사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해 별정직 공무원으로 등기소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발을 들인 곳이 명동이었다. 20대를 갓 넘겼을 때다.
김 회장은 "명동을 만난 것은 어쩌면 나의 운명이었다"며 "그때 명동이 아무리 좋았다고 해도 그 곳으로 이끄는 어떤 힘이 없었다면 어찌 명동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겠는가”라고 했다.
스물 네 살에 대흥사를 차리며 독립한 김 회장은 남들보다 두 배로 일하고, 두 배로 고민하고, 두 배로 빨리 목표했던 일을 해결해 이름을 알렸다. 그런 그에게 주변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명동의 백 한 바퀴’ 였다. 매일 아침 출근한 뒤 명동 일대를 백 한 바퀴를 도는 그의 성실함을 빗댄 것이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명동 사채 시장에서 그는 발품을 팔아가며 채권을 배웠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그는 그렇게 해서 채권업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1990년 세종그룹의 전신인 홍승기업을 설립한 김 회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였던 1998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동아증권(현 NH농협증권)을 30억 원 가량에 인수하며 증권업에 뛰어들었다. 세종증권으로 사명을 바꾼 김 회장은 사이버트레이딩 수수료를 업계 최저수준으로 낮추고 비싼 휴대용 단말기를 고객들에게 나눠주는 등의 영업 전략을 펴면서 단기간에 회사를 업계 10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2005년 말 세종증권을 약 1103억 원에 농협중앙회에 넘겼다.
김 회장의 다음 목표는 그동안의 삶과 전혀 다른 통신사업이었다. 2007년 법정관리 상태에 있는 지엔지네트웍스와 세종텔레콤, 2011년 부실경영 상태에 있는 온세텔레콤을 연이어 인수했다. 김 씨의 행보를 두고 주위에서는 “김형진이 망하러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돌기까지 했다. 업체간 경쟁이 치열한 통신업계를 김 회장이 잘 알 수 있겠냐는 것이다.
김 회장은 유상증자와 경영개선을 통해 5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만들며 능력을 입증했다. 이어 세종텔레콤의 통신부문 인력과 자산을 온세텔레콤에 넘긴 뒤 지난해 4월 1일 통합법인 ‘세종텔레콤 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유무선 융합 통신사업자로 발돋움을 꿈꾸는 세종텔레콤은 제4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위한 도전을 진행중이다.
“시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실패”라는 그는 “세계 ICT 시장에서 후발주자들이 전통강자를 추월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인프라 사업만으로는 생존에 한계가 있다. 앞으로 사물인터넷(IoT) 시대가 열어갈 초연결 사회의 변화에 맞춰 세종그룹도 빠르게 변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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