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정진영 기자 = 영화의 힘은 세다. 한 편의 영화는 누군가에게 좌표이자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 저마다의 이유, 저마다의 감성이 담긴 한 편의 영화. '인생, 극장'은 감독들이 꼽은 인생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다.MBC 아침드라마 '좋은사람'의 김흥동 PD의 인생작은 누구나 한 번은 매료될만한 영화 '중경삼림'이다.
"대학 때 봤죠. 극장에서."
슬며시 웃는 얼굴. 그 눈빛은 잠시 20대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레드 썬!' 누가 주문이라도 외운듯 머리에서 순간 노래 한 곡이 울리기 시작한다.
'캘리포니아 드리밍 온 서치 어 윈터스 데이. 올 더 리브스 알 브라운. 앤 더 스카이 이즈 그레이. 아이브 빈 워킹 온 어 윈터스 데이.
California dreamin' on such a winter's day.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캘리포니아 꿈을 꾸네 이 추운 겨울 날에. 낙엽이 지고 하늘은 잿빛이야. 이 겨울 날 나는 계속 걷고 있네.'
1965년 발표된 마마스앤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1994년 '중경삼림'에 삽입되면서 홍콩은 물론 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시 애창됐다. 뉴욕의 잿빛 하늘을 보며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그리는 이 단조로운 멜로디의 노래는 지저분하고 복잡한, 하지만 왠지 감각적인 홍콩의 거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노랑머리 마약밀매 중계자, 경찰 663, 경찰 223. 제대로 이름도 불리지 못 하는 서로 다른 네 명의 주인공들은 복잡한 홍콩의 거리에서 부유한다. 서로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대신 이들은 내레이션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건 대화할 대상조차 자신으로 한정되는, 이를테면 고독이다.
"왕가위 영화에 안 빠지는 청춘이 있을까요. 저의 인생작이라곤 하지만 그때 그 시기는 다 그런 것에 빠질 시기니까… 마치 하루키를 좋아했던 것과 같은 그런. 괜히 서정적인 것을 동경했었죠."
청춘은 대개 불안하다. 안정된 게 없고 미래가 캄캄하다. 어른이 된 것 같은데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맘때쯤 깊은 사랑에 빠지고 또 이별도 한다. 한없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피워낼 방법을 몰라, 혹은 피워낼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해 음울한 청춘들의 이야기는 '중경삼림'에서 사랑을 잃은 두 명의 남자로 형상화돼 드러난다. 김 PD의 "왕가위 영화에 안 빠지는 청춘이 있을까"라는 말이 이해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춘에게 '중경삼림'이 그저 위안이나 공감이라면 김흥동 PD에게는 감독의 길로 이끈 작품이다.
"영화에서 마마스앤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흘러나오는데… 그때부터 '영화를 한 번 찍어 보고 싶다. 저런 걸 한 번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저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대사 중심적인 작품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사실 그때는 왕가위의 영화처럼 시적인 작품들을 만들고 싶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중경삼림'을 떠올리며 홍콩을 찾는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만일 꼭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 후로 적어야겠다.' 223의 독백처럼 '중경삼림'이 청춘에 가지는 효력도 이렇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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