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읽고 전율한다.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자처한 후미코는 박열에게 동거를 제안하고, 다다미 6장짜리 단칸방에서 동지로서 연인으로서 함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해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괴소문으로 인해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된다. 이에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자 일본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그들이 원하는 영웅”으로서 사형을 쟁취하려 한다.
유난스레 박열을 추켜세우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이분법적 사고로 인물을 가두거나 조롱하지도 않는다. 이 감독의 이러한 태도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거북함을 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큰 울림을 선물한다.
영화 ‘동주’가 정적으로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박열’은 역동적이고 유쾌한 태도로 일관한다. 위트 있는 인물들과 영화적 구성은 인물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며 상업영화로서 제 몫을 해낸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묵직한 아픔을 가장 불량한 조선인들이 타파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동주’와 ‘박열’은 이란성 쌍둥이”라는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두 작품은 같은 듯 다르다. 동일한 출발선이되 완벽히 다른 이야기로 변주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동주’가 소년들의 내재한 아픔을 찔렀다면, ‘박열’은 외재된 아픔을 타파하는 섹시한 어른들의 세계를 만나볼 수 있게 한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뛰어나다. ‘파수꾼’, ‘고지전’의 이제훈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박열’은 선물 같은 작품이 될 것이다. 최근 다정다감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굳어졌던 이제훈의 예리함을 다시금 만나 볼 수 있다. 후미코 역의 최희서 역시 눈에 띈다. 완벽한 일본어 대사는 물론 어눌한 한국어 대사까지 조금의 어색함도 느낄 수 없다. 보는 이들을 완벽하게 몰입하게 만들며 감정 연기 또한 깊고 풍부하다.
미즈노 렌타로 역의 김인우 역시 마찬가지. 이제까지 김인우라는 배우를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 아까울 지경이다. 이외에도 예심판사 다테마스 역의 김준한은 전작 ‘동주’ 속 최희서처럼 이번 작품의 히든카드로 보인다. 28일 개봉이며 러닝타임은 129분, 관람 등급은 12세 관람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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