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36] 만리장성은 어떻게 무너졌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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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0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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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첫 해 승전(勝戰)바탕 새 전쟁 준비
첫해의 전투에서 칭기스칸은 두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적어도 야전에서는 금나라 군대가 결코 몽골 기마병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단숨에 제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진 = 몽골군의 성곽 공격]

공성전(攻城戰)에 익숙하지 못한 몽골군이 견고한 성안에서 버티는 금나라 군대를 제압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 몽골 초원으로 돌아간 칭기스칸은 첫해의 전투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해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몽골군의 파상적인 공격에 혼이 난 금나라는 내부를 정비하며 다가올 전투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거란족 대거 칭기스칸 휘하로
첫해 힘겨루기는 몽골측의 우세로 판가름 났다. 여기에서 전투에서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212년 거란족의 황족 출신인 야율유가(耶律留哥)가 10만 명의 병사를 모아서 스스로 도원수라 칭하고 요동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곧바로 칭기스칸과 연맹을 맺고 금나라 쪽으로 칼을 겨누었다. 전력은 급격히 몽골군이 우세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유목 키타이족이라 불리 우는 거란족은 과거 요나라를 세웠던 종족으로 용모나 풍습, 언어, 관습 등이 거의 몽골인들과 흡사했다.

이들은 금나라 체제 아래서 주로 북방지역 방어와 말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아왔다. 또한 금나라의 주요한 기동부대는 대부분 이들 거란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무방비 상태가 된 요동지역
이처럼 금나라 군대의 기둥을 이루고 있던 거란인들이 대거 몽골진영으로 흡수되고 있는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킨 야율유가까지 칭기스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지원을 요청해 왔던 것이다. 금나라의 변경 지역 방위와 군마 관리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던 거란족이 몽골 쪽에 귀부(歸附)해 버리자 금나라로서는 치명타를 맞은 꼴이 됐다.

자연히 요동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탁월한 기동력을 갖춘 유목민인 거란인들은 그대로 몽골의 천호제 체제 안으로 들어와 몽골군이 돼 버렸다. 몽골군의 전력이 급상승한 것은 당연했다. 95개의 천호가 10년 동안에 129개로 늘어나게 되는 데 그 대부분이 이들 거란인들로 채워졌다.
 

[사진 = 전쟁터에서의 사냥]

게다가 거란족은 과거 대 제국을 형성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와 행정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위구르인들과 함께 대몽골제국의 바탕을 닦는 데 한 축으로 기여하게 된다. 아무튼 거란족이 몽골을 선택하면서 전쟁의 대세는 몽골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그래서 이후 금나라와의 전쟁은 몽골군의 질풍노도와 같은 공세와 금나라의 지리멸렬(支離滅裂) 상태의 패배가 이어지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세 갈래로 중도 공략
이듬해인 1212년 중국 땅에 다시 나타난 푸른 군대는 중도 근처의 주요 도시들을 파상 공격하면서 주변 국토를 황폐화 시켰다. 그 해 가을 이미 한해 전에 점령했었던 서경을 다시 공략하던 중 칭기스칸이 활에 맞아 부상하면서 군사 작전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 = 칭기스칸 어전회의(칭기스칸 가묘 벽화)]

1213년, 새롭게 진용을 갖춘 칭기스칸 군대는 3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중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주치와 차가타이, 오고타이 등 칭기스칸의 세 아들 이끄는 우익의 제 1군단은 산서 중부 지방을 돌파해 태원(太園)과 평양(平壤)을 함락시켰다. 최고의 명사수인 동생 카사르와 막내동생 테무게가 이끄는 좌익의 제3군단은 발해만을 따라 영평(永平)과 요서(遼西)로 향했다.

막내아들 툴루이를 데리고 칭기스칸이 직접 이끈 중도 제2군단은 하북(河北)과 산동평원(山東平原)을 가로질러 제남(齊南)을 함락시켰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이 공격 형태는 흉노 이래 유목민 특유의 공격 전술이었다. 북중국 땅은 완전히 전화의 회오리 속에 휩싸였다. 살육과 약탈이 이어지고 국토는 황폐화 됐으며 백성들은 전란을 피해 각지로 흩어졌다.

▶기습공격으로 거용관 장악
칭기스칸의 중군(中軍)은 중도의 입구에서 다시 거용관과 마주쳤다. 한차례 제베에 의해 함락된 적이 있는 거용관은 그 동안 금나라측에 의해 다시 재건됐고 정예부대가 배치돼 있었다. 칭기스칸은 천혜의 요새를 무모하게 정면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발주나 호수에서 맹약을 맺었던 이슬람상인 자파르를 활용했다. 그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파르를 상인으로 위장시켜 보냈다. 금나라측은 그가 정탐하기 위해 온 것을 눈치 채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사진 = 뮤지컬 징기스칸]

그러나 몰래 탈출한 자파르는 칭기스칸 진영으로 돌아가 빽빽한 숲 사이에 나 있는 외길을 통해 성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줬다.
칭기스칸은 즉각 야간 기습 공격을 준비했다. 칭기스칸 군은 야음을 틈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자파르의 인도를 받아 성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튼튼한 성을 믿고 편안히 잠을 자던 금나라 군사들은 급습을 받아 그 자리에서 대부분 살해됐다. 중도를 지키는 최후의 관문인 거용관은 이처럼 힘없이 몽골군의 손에 떨어졌다.

▶금나라 궁정 내 반란, 선종 즉위
몽골과 금나라 사이에 결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금나라 조정에서는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 1213년 8월, 북방 변경의 지휘를 맡고 있던 여진족 장군 홀사호(胡沙虎)가 중도로 돌아와 위소왕 영제를 죽이고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吾睹補)를 황제로 세웠다.

그가 바로 선종(宣宗)이다. 그러나 선종도 전임자처럼 무능했다. 그 동안 칭기스칸 군대는 중도를 포위한 채 황하 이북의 전 지역에서 약탈과 대학살을 자행했다.

▶우세한 전세 속 화친 제의
1214년 초, 중도의 북쪽에 진을 친 칭기스칸은 금나라에 화친을 제의하는 사신을 보냈다. 많은 장군들이 금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틈타 결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으나 칭기스칸은 고개를 저었다. 금나라를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호기를 놓치고 화친을 먼저 제의하고 나선 데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오래 중도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식량이 바닥난 심각한 상황인데다 역병까지 만연해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리품 챙겨 다시 초원으로

[사진 = 강화를 요청하는 금나라 사신]

사신으로 파견된 사람은 이슬람 상인 자파르였다. 자파르가 추진한 협상은 성과를 거두어 금나라는 여진 공주와 황금, 비단, 5백 명의 동남․동녀, 3천 두의 말을 전쟁 배상금으로 헌납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전리품을 챙긴 칭기스칸의 군대는 몽골의 하영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실상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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