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대장경(大藏經)이란 무엇인가? 가장 쉽게 말한다면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서(聖書), 이슬람교의 코란(Koran)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교리가 빠짐없이 기록돼 있는 경전이라고 보면 된다.
대장경은 범어로 트리피타카(Tripitaka)라 부른다. ‘세 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도리인 율(律),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 놓은 논(論)이 그 세 가지다. 광주리에 담긴 것이 이 세 가지이기 때문에 삼장경(三藏經)이라고도 하고 불교경전 전체를 뜻한다는 의미로 일체경(一切經) 이라고도 한다.
▶ 현존 대장경 가운데 가장 우수
일찍이 인도에서는 불전을 나뭇잎에 새겨 ‘패엽경(貝葉經)’이라 불렀다. 하지만 자연재해나 전화 등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다 보니 돌이나 나무에 새겨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바로 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진 팔리어경전(Pali語經典)과 7세기에 만들어진 티베트대장경(Tibet大藏經)이 있지만 우리의 팔만대장경과 같은 종류인 한역대장경은 10세기 송나라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 팔만대장경 인쇄본]
▶ 거란침입 격퇴, 가피력의 덕으로 인식
대장경을 만드는 일은 시와 때를 가릴 것이 없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엄청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대장경의 가피력(加被力)으로 외적을 물리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피력이란 부처나 보살이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베푸는 힘을 말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인 1011년, 거란군이 개경까지 쳐 내려와 성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羅州)까지 피신했다.
여기서 부처의 가르침을 받드는 온 국민의 정성으로 외적을 물리쳐보자는 시도로 18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 ‘초조 고려대장경(初雕 高麗大藏經)’이다. 부처의 가피력 덕분인지 강감찬(姜邯贊)장군이 유명한 구주대첩(龜州大捷)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10만의 거란병 가운데 겨우 수천 명만 살아서 돌아가는 등 외적의 침공을 물리쳤다.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했던 이 초조 고려대장경은 몽골이 2차 침공 때 불을 질러 소실됐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불력에 의한 구국을 기대하며 대장경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 16년간에 이르는 대 작업 시작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이 간절한 기원을 들어사, 신통의 힘으로 완악(頑惡)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 다시는 우리 국토를 짓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나라 안팎이 평안하며 나라의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주신다면 제자 등은 마땅히 노력하여 더욱 법문을 보호하고 부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합니다."

[사진 = 이규보 군신기고문]
작업은 몽골의 침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지대인 강화와 남해 두 곳에서 진행됐다.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자작나무, 후박나무 등 10여종의 목질이 좋은 나무들이 두 곳으로 실려 왔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였다. 해인사 대장경연구소가 직접 조사한 결과 두 나무가 전체 83%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남해지방에만 분포하는 후박나무와 굴거리나무도 포함돼 있어 판각장소 가운데 한 곳이 남해였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 오․탈자 하나 없이 5천3백만 자 새겨

[사진 = 팔만대장경 조조]
그렇게 만들어진 경판은 총 8만 천 2백여 판으로 앞뒷면에 판각이 됐으니 쪽으로 따지면 16만 2천여 쪽에, 새겨진 글자만 해도 5천 3백만여 자였다. 그냥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글자를 칼로 나무판에 하나하나 새겼다. 그 것도 마치 한사람이 쓴 듯이 똑같은 필체의 정자로 새겨졌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글자에 오자나 탈자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이 같은 결과는 얼마나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판각을 하고 교열을 보는데 시간과 공을 얼마나 들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기업들이 품질향상과 무결점 운동을 펼치면서 결함이 없다는 성경과 함께 팔만대장경을 거론하며 본받을 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만하다.
▶ 순도 99.6%의 구리 야금 기술
판각을 마친 뒤에는 경판 양쪽 끝에 경판보다 약간 높게 두꺼운 각목으로 마구리를 만들고 그 네 귀퉁이에 구리판을 붙였다. 경판의 뒤틀림이나 터짐을 막고 경판끼리 서로 부딪쳐서 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구리의 순도는 99.6%, 전기분해기술이 없던 당시 고려인들이 신비에 가까운 야금 기술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 = 팔만대장경 목판]

[사진 = 선원사지]
▶ "해인사 이전 이룬 무학대사의 혜안"

[사진 = 가야산 해인사 현판]

[사진 = 대장경판전 비석]

[사진 = 성철스님]
▶ 또 하나의 금자탑 장경판전

[사진 = 팔만대장경 조조]

[사진 = 장경판전]

[사진 = 김영환 장군]

[사진 = 김영환장군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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