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시진핑을 모르겠거든 시중쉰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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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8-04-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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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④

시중쉰과 시진핑(왼쪽), 시중쉰의 젊었을 적 사진.[사진=바이두]


용비어천가는 1544년 훈민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책이자 한글 반포 이전에 지어진 유일한 한글 작품이다. 제목은 용이 날아 올라 하늘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조선왕조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한편으로 현대 한국에선 ‘반신반인 박비어천가’, 이비어천가, 박비어천가 O비어천가... ‘육룡이 나르샤’식 정권찬양물의 대표로 폄하돼 인구에 회자되곤 한다.

이웃 중국에서도 특히 지난달 헌법을 개정하여 시진핑 1인체제를 구축한 직후 각계각층에서 각양각색의 ‘시(習)비어천가’가 난무하고 있다.

용비어천가가 세종의 아버지 태종으로 시작해 태조, 태조의 고조할아버지 목조까지 ‘육룡의 나르샤 혈통’을 자랑하는 식으로 물론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习仲勋, 1913~2002) 찬송가가 울려퍼지고 있다. 하지만 '시중쉰 찬송가'는 완전한 허구만은 결코 아니다. 시중쉰은 시진핑이 출세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해 만방에 이름을 떨치던 군인이자 정치가, 제도개혁가이자 행정가로서 ‘신중국을 낳은 8대원로’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위인이다.

◆“그 아들을 모르겠거든 그 아비를 보라.(不知其子 視其父)” <공자> 

시 주석을 알려면 우선 그의 아버지 시중쉰을 알아야 한다. 주로 일본과 홍콩 매체에 의해 ‘태자당’으로 자리매김된 시진핑을 알려면 그 태자를 낳은 부모를 소상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중쉰은 1913년 10월 15일 산시성(陕西)성 중심도시 시안(西安, 옛 이름 장안)에서 동북쪽으로 60㎞쯤 떨어진 데 위치한 푸핑(富平)현의 '시(習)씨 집성촌'의 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중쉰은 1927년 1월 푸핑현 제1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봉건 교육제도와 불량 교사들을 비판하다가 제3사범학교로 전학조치됐다. 1928년 봄, 15세 조숙한 반항아는 다시 극렬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감옥에서 중국공산당 청년단에 가입했다. 1930년 초 공산당 조직은 그를 중국 국민혁명군 양후청(楊虎城)부대 소속 병참담당 서기로 침투시켰다.

1932년 3월 시중쉰은 뤼젠런(呂劍人), 리트성(李特生),쉬텐제(許天潔) 등 반골 청년들과 함께 후일 ‘양당병변’(兩當兵變)'이라고 불리는 간쑤(甘肅)성 최초로 공산혁명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유격대장 류즈단(劉志丹)과 용서우(永寿)현을 침공하였으나 국민당군에 참패하고 고향으로 잡입하였다. 그해 9월 그는 간쑤성 동부 황토고원인 웨이베이(渭北) 혁명근거지로 들어가서 웨이베이 대대 제2지대 정치위원직을 맡아 황토고원을 종횡무진했다.

1933년 2월, 시중쉰은 공청단 싼위안중심(三原中心)현 서기가 되어 농민폭동과 무장혁명을 주도하고 1935년 3월 산간변구(陝甘邊區·산시성과 간쑤성 변경지역) 소비에트 정부 주석으로 등극했다. 그의 나이 약관 21세.

◆“이렇게 젊다니 완전히 얘잖아!” <마오쩌둥>

1935년 9월 국민당군의 포위와 추격을 뚫고 18개의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2500㎞ 도망길, 이른바 ‘대장정(大長征)’ 선발대 홍25군이 산간변구 소비에트의 중심지 옌안(延安)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은 돌연 기존의 산간변 소비에트 간부진을 반당 반역혐의로 체포했다. 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한 것이다. 시중쉰이 황토굴속에 처박혀 생매장을 당하기 직전, 다행히 마오쩌둥의 중앙홍군이 옌안에 도착했다.

마오는 옌안 곳곳에 걸린 산간변구 소비에트 포고령과 시중쉰 주석이라는 이름에 흥미를 갖고 "시중쉰이 누구인가, 데려와라"라고 명령했다. 22살의 시중쉰을 접견한 마오는 너무도 젊은 그를 보고 “이렇게 젊다니 완전히 애잖아! ” 라고 탄성을 질렀다.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이 시안에 독전하려온 장제스 총통을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제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이른바 ‘시안사변’이 발생했다. ‘시안사변’은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 합작(1936~1945)이 이루어져 함께 항일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불법화했던 공산당을 합법화했고, 공산군인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으로 재편성됐다. 시중쉰은 서북지역 팔로군에 소속되어 군최고 지휘관인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당 1인자인 서기등 당정직을 겸직하며 항일혁명가로서의 발군의 리더쉽을 발휘했다. 후일 그의 아들 시진핑이 군정치위원을 중심으로 당정직을 좌우로 겸한 것처럼.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의 항복선언으로 항일전쟁이 승전으로 끝났다. 연이어 제2차 국공합작도 끝났다. 그때부터 항일혁명가 시중쉰은 국공내전(1946~1949) 승전까지 철저한 공산혁명가로 변신했다. 그는 서북국 서기, 서북국 야전군 정치위원 등을 맡았고 펑더화이(彭德懷)와 허룽(賀龍)을 도와 국민당군에 대승했다. 이러한 눈부신 전공으로 시중쉰은 서북 5개 성의 당·정·군을 모두 맡는 이른바 ‘서북왕’이 됐다.

◆오마진경(五馬進京)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대륙을 5대 지역으로 분할통치했다. 서북국(西北局)에 시중쉰, 서남국 덩샤오핑, 동북국 가오강(高岡), 중남국 덩쯔후이(邓子恢), 화동국 수스(饒漱石). 하지만 이들 5대마(大馬)의 분리독립과 할거주의를 우려한 마오는 1952년 9월 이들 다섯 대마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이름하여 '오마진경'(五馬進京). 가오강에게 국가부주석, 덩샤오핑에게 제1부총리, 5대마 중의 최연소 당시 39세 시중쉰에게 부총리 겸 당선전부 부장 등의 직책을 주었다.

마오는 이듬해 ‘동북왕’ 가오강과 ‘화동왕’ 라오수스 두 대마를 제거, 5대국(5大局) 지방분권통치를 폐지하고 중앙집권화했다. 그로부터 시중쉰은 10여년간 국무원 부총리겸 비서장으로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를 도와 주로 국가 중대방침과 정책 결정, 각종 제도와 법령 제정 작업을 담당했다.

시진핑 나이 9세 되던 해 1962년 ‘류즈단(劉志丹)’사건이 발생했다. 리젠퉁(李建彤)이라는 한 여류소설가가 시진핑의 상사였던 류즈단의 일생을 소설형식으로 ‘광밍르바오(光明日報)', ‘궁런르바오(工人日報)', ‘중궈칭넨바오(中國靑年報)'등에 연재했다. 리젠퉁은 이를 장편소설로 묶어서 출판할 작정으로 시중쉰에게 감수를 맡겼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숙적 가오강을 연상하는 인물이 소설 <류즈단>에 등장했다. 한때 ‘서북왕’으로 불리던 시중쉰은 ‘동북왕’ 가오강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62년 9월 24일 제8기 10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직접 거명하며 "소설을 이용하여 반(反)당 반민족을 꾀하는 위대한 발명가" 라는 신랄한 공개 비판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시중쉰은 하루아침에 반당 세력으로 몰려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가택은 몰수되고 뤄양(洛陽)광산 노동자로 축출당했다. 멸문지화의 일보직전의 경지, 부인 치신(齊心 1926~)과 시진핑 등 네 자녀가 뿔뿔이 헤어지는 ‘강제성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다.

사실 마오쩌둥은 <류즈단>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 인민복을 입은 공산황제 마오쩌둥은 5대마 중의 2대마인 덩샤오핑과 시중쉰의 건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시중쉰은 문화대혁명의 고조기 1967년에는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1년간 갖은 수모를 당했다. ‘반당분자 시중쉰’이란 글씨를 목에 건 채 조리돌림을 당하고 비판대에 서야 했다. 1968년부터는 만 8년간이나 베이징의 인민해방군 위수지역의 독방에 연금되어야 했다. 1975년 5월 덩샤오핑이 잠시 재기에 성공하여 제1부총리를 맡았을 때 시중쉰은 연금에 풀려나 뤄양으로 돌려 보내졌다.

◆임기제 헌법 제정한 시중쉰, 임기제 철폐 개헌한 시진핑

시중쉰 동상. [사진=바이두]


3전 3기에 성공해 정국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1978년 2월, 시중쉰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정협위원 감투를 씌어줬다. 그해 봄 4월 5~28일까지 무려 24일간 중공중앙공작회의가 밤낮없이 속개됐다. 시중쉰은 광둥의 상황을 보고하며 한국의 성공 경험을 참조해 광둥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광둥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 등에 수출특구를 건설할 것을 전격 제안했다. 당시 명목상 1인자 화궈펑(華國鋒) 당주석을 비롯한 참석자 대다수는 그의 불온한(?) 제안에 고개를 격렬히 흔들며 반발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총설계사는 달랐다. 덩샤오핑은 “중앙은 돈이 없으나 정책은 있다. 자네가 한번 출구를 찾아보라" 며 시중쉰의 손을 들어줬다.

덩사오핑은 그를 광둥성 제1서기겸 성장 겸 광저우 군구 제1정치위원으로 임명, 경제특구 설립 등 개혁개방의초석을 다지는 임무를 부여했다.

'특구 전문가‘ 시중쉰은 젊어선 봉건주의 황색 바다에 공산홍군의 빨간 섬 '산간변 특구'를 만들더니 늙어선 사회주의 붉은 바다에 자본주의 파란 섬 '경제특구'를 만들었다.

1980년 2월 25일 중공중앙은 시중쉰을 공식으로 사면 복권했다. 덩샤오핑은 그를 전국상무위원회 부위원장(국회부의장 격)겸 법제위원회 주임(법사위원장)을 임명하여 당장(黨章·당헌)과 헌법 개정을 총괄하는 특별 임무를 부여했다. 1982년 9월 전면 개정된 당장과 그해 12월 제헌 수준으로 전면개정된 1982년 헌법의 총괄 입법 책임자는 시중쉰이었다.

특히 1982년 헌법은 형식 내용 제정절차 등이 현대적인 법률체계를 갖추고 있고 임기제와 개혁·개방과 경제체제 및 정치체제 개혁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명기하는 등 중국적 현실을 감안하여 제정된 것으로 헌법으로서 명실(名實)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시진핑과 그의 부친 시중쉰은 둘 다 정치군인이자 변법가(變法家·제도개혁가)다. 그러나 인민복을 입은 정치군인 시중쉰은 임기제한의 1982년 헌법을 기초했으나, 신사복을 입은 정치군인 시진핑은 2018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주석 임기제한을 철폐했다.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자 시중쉰은 분명하고 강력한 어조로 군부의 강경진압을 반대했다. 1993년 3월 시중쉰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광둥성 선전에 은거했다. 86세의 고령에다 와병 중이던 시중쉰은 1999년 10월 1일, 건국 50주년 국경절 행사때 톈안먼 망루에 오르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모두들 시중쉰의 건강을 염려해 반대했다. 그러나 신중국 8대 원로 시중쉰의 뜻이 너무 완강해서 중앙정부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중앙은 특별기와 의료진을 선전으로 보내 시중쉰을 모셔왔다. 시중쉰은 당시 장쩌민 국가주석, 후진타오 부주석 등 정치권 상무위원들을 일일이 만나 격려했다. 대원로의 뜨거운 격려에 수뇌들은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자리에 당시 푸젠성 대리성장이던 시진핑이 시중쉰을 부축했다. 지방 간부중의 하나, 그야말로 ‘원 오브 뎀’에 불과하던 시진핑은 부친 덕분에 중앙지도부에 눈도장을 찍고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었다.

2002년 5월 24일 시중쉰은 베이징에서 병사하여 화장된다. 만 3년 후 2005년 5월 24일 시중쉰의 유골을 고향 산시성 푸핑으로 이장하던 날 그의 부인 치신은 유족대표로서 이렇게 말했다.

“시중쉰 동지가 마침내 광활한 황토의 땅인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유지를 떠받들어 각자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여 후손들을 양성할 것입니다.”
 

시중쉰 탄신 100주년 기념 좌담회(2013.10.15.인민대회당) 시진핑 국가주석, 자오러지 당시 산시성 당서기 현 정치국상무위원 등 참석 [사진=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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