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노래할 땐
잠자코 들어주는 거라,
끝날 때까지.
쩍...소ㅎ쩍...
ㅎ쩍
...훌쩍...
누군가 울 땐
가만있는 거라
그칠 때까지.
윤제림의 '소쩍새'
이 시 속의 소쩍새를 진짜 소쩍새로 생각할 수도 있다. 새들은 노래와 울음이 같다. 새들에게도 즐거운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겠지만, 그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노래이기도 하고 울음이기도 하다. 인간이 새들의 감정을 눈치챌 만큼 정밀한 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얘기도 되리라.
윤제림의 소쩍새는 그러나 '사람 새'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날 취해서 몰려 들어간 노래방이나 술집에서 '소쩍새'를 부르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래 제목은 '소쩍새'가 아니라 '낭랑 18세'일 것이다. 1940년대에 백난아라는 가수가 불렀던 그 노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더없이 비참했던 나라의 18세쯤 되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건드렸던 애틋한 기다림의 노래다. 낭랑은 '목소리가 청아하고 아름다운 것(琅琅)'과 '귀한 여성(娘娘)' 어느 것을 뜻해도 괜찮다.
"저고리 고름 말아 쥐고서 누굴 기다리나 낭랑 18세 / 버들잎 지는 앞개울에서 소쩍새 울 때만 기다립니다/소쩍꿍 소쩍꿍 소쩍꿍 소쩍꿍 소쩍꿍 새가 울기만 하면 떠나간 그리운 님 오신댔어요" 취기 가운데 노래방에 온 어느 친구가 마이크를 저고리 고름처럼 말아쥐고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소쩍새의 노래와 울음이 분간이 안 되듯, 이 친구의 노래도 문득 울음으로 변한다. 소쩍꿍 소쩍꿍 대목에 가서, 그는 어머니에 빙의한 듯 한스럽고도 고통스럽던 시간을 울어내는 것이다. 이 때, "저 친구 왜 저래? 분위기 깨고 있네"라며 마이크를 빼앗는 것은 노래를 모르는 자다. 적어도 윤 시인의 잣대로 보면 그렇다.
세상 살다 보면 도처에 소쩍이 훌쩍이 되는 슬픔의 복병이 도사린다. 날마다 꾹꾹 눌러놓은 그 아프고 괴로운 심경이 때로는 노래의 수도꼭지로 떨어지는 물살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요즘처럼 벌이가 끊겨가는 자영업자들이나 일자리를 찾지 못해 죄인처럼 지내는 청년들과 일찍 퇴직해 몇 푼이 아쉬운 중노년들. 부동산까지 옥죄어 돈이 될 곳이 없는데, 세상은 날마다 미세먼지를 들이부어 숨마저 막히게 하니, 어디 늦은 밤 소쩍새라도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일제강점기의 절망적 슬픔까지 소환하니 더욱 비감하다. 저 소쩍꿍의 훌쩍거림이 한 편의 시다. 그냥 들어주라.
이빈섬(시인·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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