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시샘]빗방울을 흩다 -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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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2-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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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웃자 그녀 쪽 유리잔이 떨렸다
그녀 고개 들자 내 잔 속 물이 떨었다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만났고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남는다
낮 두 시 찻집 베트남
그녀와 나는 할 말이 없다
창밖 인조 대숲에선 빗발이 글썽거리고
그녀 낮은 콧등처럼
그녀 외로움도 저랬을까
그녀를 두고 간 옛 남자의 반지 자국이
그녀 짧은 손가락 마디를 기어 나와
바깥 창 빗방울 잠시 흩는다.

                        빗방울을 흩다 / 박찬일


이 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기 막힌 상황이다. 그녀와 나는 맞선을 보러 나왔다. '소개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부르기에는 남녀 사이에 너무 설렘이 없어 보인다. 집에서 하도 떠밀기에 마지 못해 "그래, 한번 보지뭐"하는 기분으로 나온 두 사람. 그녀는 자리가 멋쩍어서 한번 웃었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기 곤란해서 한번 들었다. 그때마다 남녀 앞에 놓인 물잔이 심란한 마음처럼 흔들린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으나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관심도 별로 높아지지 않았고 이 상황이 권태롭기만 하다. 자리를 옮기면 좀 나을까 싶어서 서둘러 찻집으로 옮겼는데, 여전히 남남. 처음에도 남남이었는데, 지금도 데면데면하다.

하필 들어간 찻집 이름이 베트남이다. 여기 두 남남에 딱 맞는 베트'남'. 서로 할 말이 없이 바라보기가 머쓱하여 바깥을 훑는데, 마침 빗방울이 떨어진다. 베트남 흉내를 내느라 얼기설기 설치해놓은 가짜 댓잎 위에 비가 뚝뚝 듣는다. 비를 보는 사이에 예의상, 흘낏 그녀를 훑어본다. 콧등이 낮은 여자. 얼굴에서 까닭 모를 외로움 같은 게 느껴진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 남아 있는 흰, 반지 자국 하나가 눈에 띈다. 옛 남자의 반지 자국!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랜 남자친구나 전 남편이 끼워주었을 그 반지. 오늘 맞선을 나오느라 급히 그것을 빼서 두고 나왔을 정경이 선하게 그려진다.

문득 이 시가 떠오른 까닭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 때문일 것이다. '찻집 베트남'은 우연한 설정이었을지도 모르고, 둘 중의 한 사람이 그 나라 출신이라 택한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앉은 시 속의 장면만큼이나, 트럼프와 김정은의 '하노이 테이블' 또한 복잡한 감정과 계책의 복선을 깔고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과거와 북한의 과거, 그리고 회담 장소를 내준 베트남의 과거가 그야말로 '반지 자국'처럼 서로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가. 미국과 베트남은 전쟁을 치렀고, 북한은 그 전쟁에서 베트남 쪽에 섰으며 우리는 그 반대쪽인 미국편에 섰다.

이 회담에서 거론할 수도 있을 한국전쟁 종전문제는, 1950년 전쟁의 적국이기도 한 북한과 미국이 과거의 치명적인 적의를 청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반지 자국을 가진 두 나라가 마주 앉아 비핵화와 경제제재 해제를 놓고 '딜'을 벌인다. 미국으로서는 밀어붙여야 할 미션이 분명하고, 북한으로서는 받아내야 할 보증서가 급하다. 서로가 내놓을 카드가 '완전'하기 어렵기에 이 회담의 결과를 섣불리 낙관하기 어렵다. 하지만, 회담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며 또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도 있을 수 있으니 은근히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 찻집 베트남의 두 남녀가 결국 결혼에 골인했을지 누가 아는가.

                               이빈섬(시인·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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