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카이런을 출발한 1층부터 123층 완주 직전까지 표정 변화(왼쪽 상단에서 시계 방향으로) [사진=송종호 기자]
출발선을 나선지 25분만에 50층에 오르자 대회 몇 일전 친구가 했던 우려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미 주최 측에서 제공한 티셔츠는 땀에 흠뻑 젖었다. 다음 급수대까지 아직 10개 층이나 남았다. 목은 바싹 타들어가고 눈앞이 하얘졌다. 다른 참가자들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긴박감을 더했다.
최근 롯데 스카이런에 도전한다 했을 때 친구, 직장 동료들 대부분이 반신반의했다. 역대 최고의 몸무게를 매일 같이 갱신하고 있었던 터라 그들은 기초체력이 먼저 아니겠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지난달 나갔던 10㎞ 마라톤에서 심한 무릎 통증으로 코스 절반을 걷다시피 했다. 때문에 주변에서 10층 계단 이후에 구급차에 실려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하지만 몸에 붙은 살들과 속 시원히 이별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그래서 호기롭게 “도전”을 외쳤다.
대회가 열렸던 지난 6일 하늘은 온 종일 뿌옇게 낀 미세먼지로 답답했다. 그나마 빌딩 속에서 치르는 대회라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경기도 안산에서 대회가 열리는 잠실까지 긴장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2호선 잠실역 2번 출구로 나오니 웅장한 롯데월드타워가 보였다. 사실 너무 높아서 한 눈에 담기에는 버거웠다. 고개를 들고 나서야 세계 5위, 국내 최고 123층(555m) 높이의 롯데월드타워를 실감했다.

스카이런 남자부문 1등 로보진스키 선수 결승선 통과 모습[사진=롯데물산 제공]
롯데월드타워를 거의 한바퀴 돌고서야 대회 부스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엘리트 부문의 시상식이 한창이었다. 사회자가 남자부문 우승자 피오트르 로보진스키(폴란드) 선수를 호명했다. 그의 기록은 15분 37초였다. 시상식을 보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내가 속한 그룹은 12시 45분에야 출발을 하는데, 아침까지 굶고 왔으니 뱃속이 아우성이었다. 노라조의 유행가 속 “빈 속이 날기 편해요” 가사처럼 버티려했으나 그 전에 쓰러질 것 같아 지하 마트를 찾았다. 당장 저승은 피하기 위해 물도 없이 초코바 1개를 우겨 넣었다.
12시 30분께 출발을 위해 줄을 섰다. 같은 4500번대 참가자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주최 측은 대회 안전을 위해 약 5명씩 수 십 초 간격으로 나눠 출발시켰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등에 짊어진 크로스백에서 호기롭게 스마트폰 짐벌을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그 때만해도 이 짐벌이 가장 큰 짐이 되리라곤 생각을 못했다.
출발선에서 수 십 미터를 뛰어 1층 표기에 기념 사진을 찍고 성큼성큼 내딛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한참을 올라왔다 생각했는데 아직 5층이었다. 숨은 가쁜데 이상하게 층수는 더뎠다. 전날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다리가 무거웠다. 그나마 층마다 파이팅을 외쳐주는 진행요원들 덕에 20층, 첫 급수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급수대에서 시원한 이온음료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이 기분일까 싶었다. 이온음료 덕분인지, 기분 탓인지 30층까지는 수월했다. 가뿐한 기분에 40층 급수대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42층부터 다리에서 신호가 왔다. 20층부터 쉼 없이 올랐더니 결국 다리가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쉬고 싶었다. 벌러덩 눕고 싶었다. 층계 한 곳에 앉아 숨을 고르는
다른 참가자들을 보니 더 열렬하게 휴식이 아쉬웠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다시 50층. 티셔츠는 이미 물먹은 솜 같고,
어깨에 짊어진 크로스백이 40㎏ 완전군장으로 느껴졌다. 그 속에 든 2kg 가량 짐벌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 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북한산에 오를 때면 늘 외치던 “가즈아! 종호야!”를 외쳤다.
50층부터는 무념무상으로 올랐다. 오히려 기록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자 몸과 마음이 편했다. 추월하는 이들에게 선 뜻 내 경로를 양보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다만, 두 손 잡고 나란히 오르며 경로를 방해하는 커플들에겐 짜증이 났다. 좁은 계단에서 커플의 맞잡은 두 손은 자연스레 진로방해였다. 뒤에 오던 참가자들은 그 사이 페이스 잃어버리니, 그저 고역이었다.
100층에 다다르자 3인조 그룹 거북이의 비행기가 들려왔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터틀맨의 흥겨운 랩이 걸음걸음에 힘을 줬다. 오히려 100층 이후부터는 힘들기보다 빨리 결승선을 통과하고 싶은 마음에 힘이 났다.
어느 순간 흰색 벽이 검정색으로 바뀌었다. 국내 최고 높이의 서울스카이 전망대(세계 4위·500M)에 다다른 것이다. 남은 한층은 뛰어 올라갔다. 결승선을 통과하자 국가대표라도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날 향했다. 완주였다.
결승선이 기대보다 소박했지만, 기념사진을 남기기엔 충분했다. 내 최종 기록은 45분 46초. 2917개의 계단을 올랐지만 기대만큼 살은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투를 마치고 하늘을 달렸다는 기분만은 남달랐다.

[사진=송종호 기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