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지금·여기·당신] 실리콘밸리와 베이징의 구동존이(求同存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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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부국장
입력 2019-10-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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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보기술(IT)산업의 중심 실리콘밸리는 태평양과 맞닿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간쯤에 있다. 실리콘밸리는 행정구역 지명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 남쪽 팰러앨토, 마운틴뷰, 쿠퍼티노, 새너제이 일대 80㎢를 말한다. 대략 제주도 2배 크기다.

2006~2007년 실리콘밸리의 산파(産婆)이자 요람인 스탠퍼드 대학 연수 기간 동안 이 지역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애플, 인텔, 구글, 오라클, 시스코, 휴렛팩커드 등 ‘IT공룡’, 실리콘밸리 터줏대감들이 세계 IT시장을 지배할 때였다. 페이스북, 테슬라, 우버, 에어비앤비 등 ‘잠룡’들이 잉태됐거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창의적인 사고, 혁신의 행동이 지배하는 실리콘밸리에는 인종·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서로 환한 미소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다양성이 어우러졌다.

잠시 들렀던 출장을 제외하고 12년 만인 이달 초 다시 찾은 실리콘밸리는 그 다양성이 더욱 진화한 가운데,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를 체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공유경제, 자율주행차, 가상·증강현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로봇, 클라우드, 바이오 등 혁신산업이 한창이다. 대한상공회의소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실리콘밸리에 유입된 벤처캐피털 투자액은 249억 달러(약 30조원)로 미국 전체의 38.9%다. 최근 10년간 인구는 20만명 늘어났다.

실리콘밸리 1인당 소득은 8만 달러, 거의 1억원에 육박하고 가구당 실질 평균소득은 2억원가량 된다. 벤처투자 자본과 함께 사람도 물밀듯 밀려와 이 지역 남북을 잇는 101, 280 고속도로는 새벽 5시, 오후 2시부터 각각 출·퇴근 교통정체가 시작된다. 고(故)스티브 잡스가 살았던 팰러앨토 주택가 허름한 방 3개짜리 주택이 50억~70억원, 방 1개짜리 아파트 월세가 월 300만~400만원인데도 부동산 가격은 계속 치솟는다.

지난 2일 오후 5시 30분 평일 문을 닫기 직전임에도 쿠퍼티노 애플 캠퍼스(본사) 입구 매장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십년째 활활 불타고 있는 실리콘밸리 경제 호황의 단면이다.
 

지난 2일(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시 애플 캠퍼스 입구 애플 매장을 가득 메운 소비자들. 사진=이승재 기자

1982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족 모두 이민 와 38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A씨(51)는 실리콘밸리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성공요인을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에서 찾았다.

A씨는 “실리콘밸리는 IT에서 ICT(정보통신기술) 융합산업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진보하는 인류를 위한 새로운 기술혁명·서비스혁신을 꿈꾸는 착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 각지는 물론 전 세계에서 이곳으로 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름, 차이를 인정한다. 내가 어릴 때 학교 도시락에 김치를 싸가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이 학교에 김치를 가져가면 다들 좋아한다. 초등학교 점심시간에는 세계 각국의 음식들이 서로 경쟁한다. 이곳 학교들은 한국으로 따지면 모두 다 국제학교다. 이렇게 다양성을 당연히 여기는 게 실리콘밸리 경제의 힘”이라고 말했다.

스탠퍼드 대학 교환교수로 2년째 일하는 있는 박모 연세대 교수(49) 는 “실리콘밸리는 학교든, 회사든 어디를 가도 한국인·중국인·인도인이 미국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일한다. 인종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듯하다. 그저 동료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민족, 같은 국민인데도 진영에 따라 이렇게 갈가리 찢어져 있는지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 10월 초 ‘조국 사태’가 한창일 때 들은 말이다.

10월 15일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사퇴한 다음 날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가 제11차 한·중고위언론인포럼에 참석했다. <중국이 이긴다>의 저자인 정유신 서강대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중국은 법, 문화는 물론 언어까지 잘 통하지 않던 서로 다른 31개의 성(省)을 인터넷·모바일로 하나로 묶어 31배의 시장으로 키웠다”고 밝혔다. 다름을 엮어 경제 번영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인정이 가져오는 경제, 실리콘밸리는 베이징으로 이어졌다.

정 교수의 말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확인한 건 바로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매일 동틀 무렵 열리는 국기(오성홍기) 게양식에서였다. 16일 오전 6시 30분 정각, 중국 건국 70주년을 맞아 톈안먼 광장에 설치한 붉은 파도 모양의 대형 조형물 사이에 중국인민해방군이 성대하고 장중한 국기게양식을 거행했다.
 

[16일 오전 6시30분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열린 국기(오성홍기)게양식을 보러온 인파. 사진=이승재 기자]

불과 33초 동안 국기가 올라가는 이 의식을 보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온 단체관광객 수만명이 쌀쌀한 추위에도 광장에 몰려들었다. 소수민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외국인 관광객은 필자와 동행한 김진호 단국대 교수 말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김 교수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국기게양식을 보며 애국심을 확인한다. 건국 70주년과 홍콩 사태로 중국인들이 애국심으로 더욱더 똘똘 뭉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날 열린 언론인포럼의 화두는 구동존이(求同存異·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였다. 양국 언론인들은 공히 “중국과 한국은 오랜 역사 문명교류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구동존이를 통해 상호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베이징은 2022년 동계올림픽을 개최(동계·하계 올림픽을 모두 개최하는 도시는 베이징이 최초)하는데, 그 조직위원회가 위치한 곳 역시 구동존이의 사례였다. 오래된 철강공장(수도철강단지)을 최첨단 사무실로 재탄생시킨 곳이었다. 대형 사일로를 허물지 않고 그 안에 건물을 지어 조직위 사무실과 관련 기업들을 유치했다.
 

[과거 철강공장 사일로를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등이 입주한 최첨단 친환경 사무실로 개조한 빌딩. 사진=이승재 기자]

'어울리지 않는다'며 옛 공장을 모두 철거하고 새롭게 올림픽 시설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과거 공장의 모습을 거의 보존했다. 구동존이다.

실리콘밸리와 베이징, 2019년 10월 잇따라 방문한 두 도시에서 다양성의 인정, 다름과 차이를 서로 껴안고 함께 잘 사는 경제, 사회를 봤다. '조국 사태' 전후 두 도시에서 뼈저리게 실감한 구동존이, 이제 다시 힘을 모아 펄펄 뛰는 대한민국 경제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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