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른 폭포 밑에 작은 담(潭, 연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天成, 천연)의 성전이다.
이 반상(磐上, 너럭바위 위)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 기도를 하여 구함)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기엉기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岩色, 바위빛깔)에 적응하야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大變事, 큰일)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 새로 찾아옴)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 개구리님)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선 담상(연못 수면)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날마다) 완만하여지다가 내종(결국)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 고막)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 거리두기)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 얼음덩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마리 담 꼬리에 부유(浮遊, 떠돎)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 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김교신의 산문 '조와(弔蛙)'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호, 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권두문(券頭文, 책머리에 쓴 글)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함)'의 전문이다. 200자 원고지 3장에 씌어진 짧은 글이다. 그해 3월 20일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교신은 아침시간 학교로 출근하는 길에 일제 경기도경 고등계 형사들에게 연행된다.
'개구리 이야기'인데 왜 체포했을까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조와'라는 글이었다. 담담한 수필 같은 이 글이 왜 일제의 탄압에 걸려들었을까. 연못 한 가운데 너럭바위의 기도터에서 발견한 개구리들이 가을 이후 겨울을 지나면서 저마다 얼어죽었는데 봄날 연못 밑바닥에 두어 마리가 살아있어서 전멸은 면했다고 반가워하는 저 글이 왜 위험하다고 본 것일까.
1936년 8월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내선융화(內鮮融和)의 정신은 내선일체(內鮮一體)로 바뀌었다"고 선언한다. 일본과 조선(한국)이 화합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한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는 조선에 57개의 일본 신사(神社)를 새로 지었고 1면(面) 1신사의 원칙을 세웠다. 1943년엔 전국에 854개로 늘어난다. 그리고 조선 백성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개신교 학교의 선교사들과 총독부의 갈등이 빚어지는 때도 이때다. 개신교 학교 상당수가 폐교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에 미나미는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한다. 일본 '천황의 나라' 백성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말이다.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 이런 맹세를 어린이들에게도 시켰다.
그해 11월 1일 총독은 '신사참배 국체명징(國體明徵, 국가체제를 명확히 함)의 날'을 선포한다. 기독교도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거부자는 구속했으며 교회는 폐쇄했다. 조선의 집집마다 가마다나(神棚, 신을 모신 박스)를 설치하게 하고 수시로 참배를 하도록 했다. 총독부가 행정기구에 근무하는 조선인 관리나 지방의원에게 일본어 상용을 요구한 것은 1937년이었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이었다. 이듬해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된다.
일제의 조선인 정체성 말살 작업은 1940년대에 이르면, 노골적인 종교 탄압과 언어 탄압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이 1942년의 성서조선 사건이었고 1943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김교신의 글 '조와' 필화 사건은 이미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이때 함께 구속되었던 김교신의 제자 류달영은 이렇게 증언한다.
종교 탄압 일제, 성서조선 사전검열
"성서조선은 창간호(1927년 7월)부터 폐간호(1942년 3월, 158호)까지 매월 종간(마지막 호)의 정신적 자세로 임하여 발행되었습니다. 글자 한 자 한 자 모두 일본 경찰의 검열을 거쳤지요.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 편집하여도 검열을 거친 원고는 언제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1942년 일본경찰은 '조와'를 트집잡아, 그토록 엄격하게 검열해서 발간된 성서조선지를 10여년 전 창간호까지 소급하여 정기구독자 명부에 의해서 전부 압수했고 전국에서 300여명이 검거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와'를 트집잡은 것은 이 잡지를 폐간하고 잡지 제작자와 구독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그 권두문이 담고 있는 '죽은 개구리들과 살아남은 개구리들'이 일제의 탄압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암시한다고 본 것은 과한 해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캐낸 '조와'의 진의(眞意)는 개구리를 통해 겨레의 희망을 들여다보고 있는 김교신의 심중을 꿰뚫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대적인 신사참배 정책에 역행하는 김교신 그룹과 이 종교잡지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개구리들을 핑계로 투철한 조선의 종교운동가들을 잡아넣은 건 정해진 탄압코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류영모 '뉘게로 가오리까' 글 기고
김교신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지리학과 교사로 근무하면서 매달 어김없이 성서조선을 발행했다. 발행인이자, 주필이자, 잡일꾼을 도맡아 했다. 30쪽의 잡지를 16년간 발간하는 동안 권두언(券頭言)과 일기를 쓰는 등 가장 활동적인 필진이기도 했다. '조와'를 쓸 무렵 김교신과 제자 류달영은 개성에 살고 있었다. 김교신은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였고, 류달영은 호수돈여학교 교사였다. '교와'에 나오는 그 장면을 목격한 날을 류달영은 이렇게 기억한다.
"개성에서 김교신 선생을 이웃에 모시고 살 때에 김 선생은 겨울에도 날마다 어두운 새벽에 송악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 골짜기에 작은 폭포가 있었고 그 폭포 밑에는 물이 고여 하늘 빛깔을 띤 소(沼, 연못)가 있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이 옷을 벗고 몸을 씻으며 찬송을 부르면 개구리떼가 감응하듯 몰려들었습니다. 선생은 이 개구리들을 귀여워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어 연못이 얼어붙고 개구리들도 자취를 감추어 쓸쓸해졌습니다. 봄이 다시 돌아와 연못을 덮었던 얼음이 풀렸는데 죽은 개구리들이 물 위에 떠돌아 처연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연못 밑에 아직 몇 마리의 개구리들이 살아남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단순한 개구리 얘기가 아닙니다. 일제에 수난을 겪는 우리민족을 상징한 함축성 있는 글입니다."(류달영 '한국의 미래상')
1942년 1월 4일 거듭남(重生)을 체험을 한 뒤, 성서조선 2월호에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란 간증의 기록을 올린 류영모는 그 다음달 잡지인 3월호에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를 싣는다. 유불선의 동양사상을 두루 살피며, 결국 기독교와 예수에게로 귀결되는 '성령의 진리'를 선언한 글이다. 류영모 사상의 정수와 단호한 지향점을 드러낸 귀중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실린 성서조선이 마지막 호가 됐다.
1942년 3월 30일 아침 류영모는 무엇인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편지와 원고를 정리하고 없앨 것은 아궁이에 넣어 태웠다.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던 라디오도 치워버렸다. 낮이 되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찾아왔다. 류영모와 아들 류의상이 함께 연행됐다. 류영모는 성서조선 필진으로, 류의상은 독자로 체포된 것이다. 일제는 이 잡지의 집필자와 정기구독자를 모두 잡아들였다. 전국적으로 300여명이 붙잡혔다. 12명은 미결수 감옥에 투옥된다.
일제는 '조와'를 대대적인 구속의 이유로 삼았지만, 성서조선을 폐간하기 위해 혐의들을 정리해놓고 있었다. 1930년 오산학교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남강 이승훈이 별세했을 때, 성서조선은 그해 6월호(제17호)에 '남강 특집호'를 만들었다. 첫면에 남강의 사진을 실었고, 함석헌이 쓴 남강추도문을 게재했다.
"이승훈과 류영모가 지하 독립운동 주모자"
특집호의 뒤편에는 김교신이 타계 6개월 전에 이승훈을 만났던 일을 '성서통신란'에 기록해놓았다. 남강이 서울 공덕리의 성서조선사에 찾아왔으나 그때 마침 김교신의 부재로 만나지 못했고, 이후 1929년 11월10일 오후6시에 김교신이 안국동 여관에서 이승훈을 만나 오래 대화를 나눴고 마지막 전차를 타고 공덕리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공개해 놓은 글이다.
일본 경찰은 이 글을 주목하고, 나름으로 '독립운동 시나리오'를 짰다. 성서조선은 이승훈과 연계된 독립운동 지하단체이며, 조직 우두머리는 이승훈, 그 아래에 류영모가 있고, 그 아래에 김교신과 함석헌이 있어서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로 옥살이를 했던 이승훈과의 연계가 성서조선을 불온단체로 엮을 최고의 빌미였을 것이다.
게다가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하다가 조선인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던 일제의 눈에 걸려 시리즈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도중하차한 것도, 독립운동 단체의 혐의를 돋웠을 것이다.
◆다석의 명상(冥想)한시 - 새벽마음
欲明未明晨省心(욕명미명신성심)
欲定未定每時局(욕정미정매시국)
欲平未平當世人(욕평미평당세인)
欲和未和臨天國(욕화미화임천국)
밝아질듯 말듯 새벽의 마음이로다
뚜렷해질듯 말듯 모든 때가 그렇구나
담담해질듯 말듯 사람 일이 흔히 그렇지만
고요해질듯 말듯 하니 천국이 가깝구나
새벽의 어원은 '새밝'이다. '새'는 새로운 것이란 뜻이지만 원래 동쪽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샛별(동쪽별·금성), 샛바람(동풍)과 같은 말에 그 쓰임이 남아 있다. '벽'은 밝다(明)는 우리말(밝)에서 왔는데 ,한자어 '벽(闢, 연다는 의미)'으로 차음하여 풀이하기도 한다. '동(東)이 튼다'는 말은 새벽 숲을 뚫고 햇살이 비치는 장면을 가리키는 말로, 동쪽이 밝아온다는 '새벽'이란 의미와 맞춤으로 일치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벽은 바로 깨우침의 '경계'이다.
류영모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궤좌(跪坐, 무릎꿇기)로 앉았다. 하늘 아래 꿇어앉은 사람으로, 가만히 명상에 드는 일. 그게 새벽마음이다. 새벽은 기나긴 밤의 끝이지만 아직도 채 다 밝아지지 않아 마음으로는 긴가민가하게 되는 때이다. 정말 새벽이 오긴 오는 건가 하는 의심이 홑겹으로나마 남아 있는 것도 그때이다.
어둠이 걷히고 밝아지는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이며 '파사(破私, 나를 깸)'의 찰나다. 아직은 조금 어둡지만 모든 것이 명료해져가는 타이밍이다. 세상 문제에 대해 초연해지고 담담해지는 일도 그렇다. 온갖 인연과 탐진치를 벗어나 완전한 평화를 얻기 직전의 경계에 있다. 일견 아리송하고 답답함이 남았지만 이 경계야말로 천국이 다가왔음을 말해주는 징표가 아니랴? 류영모는 세상과 담을 쌓고 절연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경계에 은거하며 신을 향해 나아간 사람이다. 영혼의 새벽은 어떻게 오는가. 미명(未明)과 광명 사이 미묘한 순간에 스민다. 한 점의 남은 미혹을 다 뚫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사람의 찰나를 그려놓은 놀라운 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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