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에 ‘부재(不在) 중’이라고 적혀 있으면 노크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린다. 어떤 상황, 자리에 있지 않는 부재는 거꾸로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보여준다. 유명한 서양철학자들의 부재-현존(現存) 개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말은 확 와 닿는다.
요즘 세 사람의 부재를 실감한다. 사람에 따라 제각각 그의 부재가 주는 존재감은 절절한 그리움 그 자체이기도 하고 비겁함, 무능함을 도드라지게 할 뿐이기도 하다.
또 <극단 학전>은 30주년이다. 여긴 한국 뮤지컬계 살아 숨쉬고 있는(6월 27일까지 공연) 전설 ‘지하철 1호선’과,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같은 토종 어린이극, 김광석-윤도현 등이 오른 소극장 라이브 공연 역사를 가진, 대학로의 ‘성지(聖地)’다.
강헌 경기문화재단 대표,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가수 한영애·박학기, 작곡가 김형석 등이 주도한 <김민기 헌정사업 추진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열일하고 있다. 김민기 대표에게 헌정하는 앨범, 공연, 전시를 직·간접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게 헌정하다’의 음원은 총 18곡으로, 6월 한달 순차적으로 공개 중이다. 지난 6일과 14일 정태춘, 메이트리, 유리상자, 이날치, 태일(NCT), 한영애, 알리, 윤도현, 윤종신, 장필순이 부른 노래가 잇따라 공개됐다. 21일에는 권진원과 배우 황정민, 박학기, 웬디(레드벨벳), 이은미의 곡이 나왔다. 다음 주에는 가수와 배우들이 ‘떼창’한 아침이슬을 들을 수 있다.
헌정앨범 총감독을 맡은 가수 박학기는 언론 인터뷰에서 “김 대표가 ‘쓸 데 없는 짓’, ‘어차피 내놓은 음악은 내 노래가 아니라 대중들 거니 어떻게 할 수는 없고, 날 끌어들이진 마라’고 했다”고 말했다.
가타부타, 왈가왈부할 거 없이 김민기는 이렇게 부재로 현존을 생생히 드러낸다.
그런데 다른 두 부재는 김민기가 주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뒤로 도망가 숨는 무책임,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무능의 현존이다.
김범석 쿠팡 창업자이자 오너는 화재 발생 5시간 만에 이사회 의장과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도망쳐 뒤로 숨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내년 1월 예정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이에 따른 책임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 노동자 9명이 과로사했고, 열악한 노동환경, 특히 물류창고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스프링클러가 화재 이후 한동안 작동하지 않은 사실도 드러났다.
쿠팡은 김범석 창업자가 이미 5월 31일 이사회 의장 등에서 사임했으며 법적으로 지난 14일 완료됐다고 반박하고 있다. 김 의장이 물러난 건 이번 물류센터 화재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건데, 그걸 화재 직후 발표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상황일까.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사업주가 안전 확보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를 형사처벌한다. 김 창업자가 국내 등기이사직에서 내려오면 쿠팡에서 안전 관련 사고가 발생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지금까지 노동자 사망을 포함한 각종 산업재해와 관련해 김 창업자는 공개적으로 직접 사과한 적이 없다. 이 문제로 여러 차례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호출됐지만 갖가지 이유로 불출석했거나 대리인을 내보냈다.
내년 3월 대선을 불과 9개월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커튼 뒤 배후자다. 지난 3월 4일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이른바 ‘측근’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그의 생각과 말을 대신 전해왔다. 만나는 사람, 찾는 공간 역시 대리인을 통해 선별적으로 공개했다.
최근에는 대변인을 2명 선임한 후 메시지를 내보내 왔는데, 그중 한 명은 열흘 만에 사퇴했다. ‘전언 정치’, ‘간보기 정치’의 한계다. ‘윤석열 X파일’ 논란까지 터지면서 그의 부재는 지지율을 갉아 먹고 있는 상황이다. 윤 전 총장은 22일 ‘X파일’ 논란과 관련해서도 메시지를 대신 전하게 했다. “공기관과 집권당에서 개입해 작성한 것이라면 명백한 불법사찰이다. 국민 앞에 나서는 데 거리낄 것이 없다”고 했다.
오는 27일 등장을 예고하고 있지만 약속대로 나타날지 어떤 입장과 목소리를 직접 낼지는 미지수다.
김민기는 ‘봉우리’에서 김범석·윤석열 두 사람에게 이렇게 읊조리고 있는 듯하다.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미국 증시 상장과 검찰총장이라는 자리, 또 그 이상의 부와 권력··· 두 사람이 오를 봉우리는 바로 여긴지도,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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