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0월 10일 다석의 어머니 김완전 여사가 눈을 감았다. 한국전쟁 중에 피란지 부산에서 장례를 치렀다. 화장을 하여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김완전은 누구인가. 1898년 8세의 류영모가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억센 손으로 아이의 항문을 틀어막았다. 무려 7시간을 그렇게 버틴 끝에 사경의 류영모를 살려낸 그 억센 모성으로 기억되는 분이다. 어머니의 손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이 성자(聖者)를 영원히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글과 나의 부모(류명근·김완전)는 탄생동갑"
7주기인 1958년 이 날에 류영모는 일기를 썼다. "1958년 10월 9일이 어머니가 세상 뜨신 지 칠년이 되는 날이다. 이제는 살, 피, 오장육부도 모두 흙이 되어 깨끗하게 바뀌어졌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왜 타계일을 하루 앞당겨 '어제'를 기록하고 있을까. 한글날(10월 9일)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류영모는 다석일지에 이렇게 썼다.
제자계해동(制字癸亥冬) 1443년
해설병인추(解說丙寅秋) 1446년
탄생동갑 1863년 1866년
선비고정칠주(先妣考正七周)
어머니 도라가신지 일곱돐날 2557 밤낮 바꿔
살알 속몬도 맑금 갈렸으리.
풀어서 읽어보면 이렇다.
훈민정음을 만든 날은 계해년(1443년) 겨울이었고
훈민정음 해설본을 낸 날은 병인년(1446년) 가을이었다
아버지 탄생(1863년)은 계해년이었고
어머니 탄생(1866년)은 병인년이었다
그러니 ‘한글’과 내 부모는 '탄생동갑'이다
어머니 작고한 지 딱 7년이 되었구나
2557번 밤낮이 바뀌었고
육신과 속엣것도 말끔히 흩어졌으리
나는 한글과 함께 태어난 사람이구나
돌아간 어머니를 추억하며, 날짜를 곱씹어보는 류영모의 마음이 짚인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뚜렷하게 짚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글'을 심어주고 일깨워준 요람 같은 존재다. 어머니가 작고한 날과 한글날이 겹치는 것을 의미있게 생각하고, 계해년과 병인년이라는 간지가, 한글의 창제와 해례본 출간의 해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탄생년도라는 점까지 찾아낸 까닭은, 그가 스스로 '한글의 아들'임을 새기기 위해서였다.
류영모는, 우리 말에 대한 깊은 자부를 드러내면서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두 줄을 오롯이 우리 말로만 써서 맑은 상념의 진수를 보여준다. "어머니 도라가신지 일곱돐날 2557 밤낮 바꿔/살알 속몬도 맑금 갈렸으리"라고.
이 날의 일기에는, 고조된 우리 말 애정을 드러내려는 듯 한자어가 하나도 없는 '단단한 우리말 시' 한 편을 아로새겨 놓았다.
한데는 바로 곧 우리 않 우리가 한덴 밖에
않밖 없있 졔계 나드리
받금 주금 밖 나므로 받금 죽음 않 살으리
- 류영모의 시조 '한데'
'한데'는 ‘바깥’을 뜻하는 말이다. 한데(바깥)는 어디 있는가. '바로 곧 우리 않(內)'에 있다. 내부인 '안'을 '않'이라고 쓰는 까닭은 원래 이 말에 ㅎ을 의식하는 뒷맛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안밖'은 원래 '않밖'이었기에 안팎으로 바뀐 것이다. 아내는 본디 '않애'였다가 안해가 되어서 아내로 변한다. '한데'는 당연히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류영모는 한데는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우리 몸은 피리와 같다. 몸을 잘 돌이켜보라. 입에서 항문까지 터널이 뚫려있는 허공일 뿐이다. 허공이 안이고 그 허공을 둘러싼 밖에, 살과 피와 뼈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공의 바깥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나 감정은, 숨으로 들어간 허공의 기운에 접속하면서 육신이 받아낸 무엇일 뿐이다. 몸은 몸 속의 허공을 둘러싼 테두리일 뿐이다. 살이 있는 테두리가 바깥인가. 아니면 살이 둘러싼 안쪽의 허공이 바깥인가. 신은 살에 붙어 있겠는가. 몸 속의 허공에 있겠는가. 한데가 바깥인가, 한데의 한데가 바깥인가.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감(靈感)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살에 붙어 있겠는가. 몸 속의 허공에 있겠는가. 그 영감이 그 골짜기의 신이기도 하다. 육신이 죽어도 그것은 죽지 않는다. 곡신불사(谷神不死)는 바로 그 말이다.
바깥의 바깥에 있는 육신
우리의 얼은, 살덩이 속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허공에 있다.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허공이다. 류영모가 말하는 ';빈탕한데'는 태양계를 넘어서 우주의 극(極)을 이루는 바깥이지만, 그것은 곧 우리 속으로 들어온 얼이기도 하다.
바깥이 우리 안에 들어있으니, 그 바깥의 나머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몸과 몬(물질)이 자기의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바깥이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이라면 나머지가 어찌 안이 될 수 있겠는가. 이 기묘한 역설로, 몸과 얼의 정체를 말한다. 몸은 바깥의 바깥이다. 이렇게 생각해놓고 보면, 맞서는 개념들이 의미하는 것이 보인다. 이 미묘한 말의 운용을 보라.
않밖은 내외(內外)이며, 없있은 무유(無有), 졔계(저기와 거기, 한얼님), 나드리는 출입(出入)이다. 이 상대적인 개념들은 상대적인 개념틀에서만 서로 맞서있을 뿐이다.
탄생의 선과 죽음의 선, 그리고 바깥
받금과 주금은, 류영모가 만든 말이다. 받금은 받는 금으로, 바뀜의 음을 살렸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바뀌는 것이다. 그 바뀜의 금, 육신을 받는 금(Birth-line)을 넘어온 것이다. 주금은 주는 금이다. 받은 육신을 돌려주는 금이 죽음이다. 데드라인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금(Birth-line)과 죽는 금(Death-line) 바깥에서 났기에, 태어나는 일과 죽는 일 안에서 살고 있다. 이 놀라운 인식을 접하면서 그저 입이 딱 벌어진다. 우리의 생애와 그 생애의 바깥. 우리가 사는 삶의 시간과 공간과 그 시공의 바깥. 오직 우리 말만으로도 이토록 심오하고 새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었던 사람이 류영모였다. 그의 신학은, 우리 말과 한글이 피워올린 생각의 꽃이었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한글은 참 이상합니다. 우리 말에는 하늘의 계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이것을 생각했는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우리 글에는 무슨 하늘의 계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류영모 ‘다석강의’]
그는 천·지·인이 어우러져 하나로 포개지는 우주적인 사건을 우리 말 구조가 담고 있다고 보았다. 류영모는 우리 말 속에서 신이 건네는 속삭임을 들었다. 우리 말을 들여다 보면 우리의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과 철학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류영모만이 아니었다. 당시 선교사로 온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세종대왕은 신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말도 했다. 류영모의 한글 시(詩)는 그 어떤 언어로 된 글보다 정밀하고도 심오하게 그 참을 담는다. 이런 한글 사용자를 본 적이 있는가.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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