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지침 초안을 발표한 지 2년 만인 지난달 24일 ‘공급망 실사법’이 장관급 이사회 승인을 받아 채택됨에 따라 유럽발 ‘공급망 실사’가 본격화했다. 후속 조치가 남아 있어 당장 바뀌는 건 아니더라도 기업 경영 환경에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특히 EU 수출기업은 실사 의무 최초 적용까지 시간이 3년가량 남아 있어 지금부터 준비해도 이르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EU 비중은 지난해 기준으로 10.8%를 차지하며 수출이 증가세를 보인다. EU 수출기업은 약 1만8000개로 전체 수출기업 중 20%에 육박한다.
■눈앞의 현실이 된 ‘공급망 실사’
EU 역내·외 기업에 공급망 내 인권 환경 실사를 의무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급망 실사법’ 정식 명칭은 ‘기업 지속 가능성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이다. 줄여서 흔히 ‘CSDDD’라고 부른다.
EU 법령안은 구속력 수준에 따라 규정(regulation), 지침(directive), 결정(decision), 권고(recommendation) 등으로 구분한다. 규정은 각국의 변형을 허용하지 않으며, 유럽의회·이사회가 제정 즉시 별도 국내 입법 없이 각국에서 효력을 가진다. 지침은 EU의 목표치로서 유럽의회·이사회가 정한 최소한의 외연에 해당하며, 각국은 국내법화 절차를 거쳐 법률로서 효력을 보유하게 된다.
‘공급망 실사’의 ‘실사(Due Diligence)’는 기업이 부정적 영향을 방지하도록 스스로 점검하는 제도이다. 실사의 출발점은 인권 실사이다. 유엔의 ‘세계인권선언’(1948년)은 국가가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일차적인 책무를 지지만 기업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권을 보호·존중·증진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유엔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년, 자유권 규약)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년, 사회권 규약), 국제노동기구(ILO) 헌장과 8대 핵심 협약 등 정신을 이어받아 1970년대 들어 기업의 인권존중 의무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대표적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1976년)과 ‘ILO 다국적 기업과 사회정책 원칙의 3자 선언’(1977년)이 있고, 2000년엔 ‘유엔 글로벌 콤팩트(UNGC)’가 출범했다.
인권 실사의 직접적 뿌리는 유엔이 승인한 ‘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보호·존중·구제’ 프레임워크(2008년)와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UN Human Rights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2011년)’이다. UNGPs는 기업에 △인권정책 수립과 서약 △인권 실사 시행 △구제 절차 제공을 요구한다. 이 중 인권 실사는 기업 활동이 인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식별·방지·완화하고 인권 영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즉 이 정도 주의의무를 기울여야 한다는 프로세스이다. 조직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화기구(ISO)의 사실상 표준인 ISO 26000에 인권 실사 프레임워크가 반영되었고, 실사를 포함한 UNGPs 조문들이 ‘OECD 다국적 기업 가이드라인’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공급망 실사 제도가 태동하게 된다.
■‘공급망 실사’의 내용
CSDDD에 따르면 원청 기업은 협력업체를 포함한 공급망 전체에 걸쳐 기업 활동이 인권과 환경 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평가하고 관리할 의무를 진다. 기존의 인권 실사를 환경 실사로 확대한 것이다. 실사 의무는 (1)실사 의무의 내재화(실사정책 수립 및 관리 시스템에 통합) (2)인권 및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식별하기 위해 매핑(mapping)과 진단(assessment) 실시, 우선순위 지정 (3)잠재하는 부정적 영향의 예방·완화 및 실재하는 부정적 영향의 제거·최소화 (4)실제 부정적 영향에 대한 구제책 제공 (5)(기업 활동 전반에 걸쳐) 이해관계자의 의미 있는 참여 (6)불만 처리 절차 수립 및 유지 (7)실사 정책 및 조치 효과성 모니터링 (8)공중과 소통(실사 결과 공시) 등이다. <표> 8단계로 구성된 실사 의무는 ‘OECD의 책임 있는 사업 행위에 관한 실사 가이드라인(OECD Due Diligence Guidance for Responsible Business Conduct)’의 6단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실사 범위는 국내에서 ‘공급망 실사법’이란 말을 쓰고 있는 것과 달리 기업의 공급사슬(혹은 공급망·supply chain)이 아니라 ‘활동 사슬(chain of activity)’이다. 활동 사슬은 업스트림 비즈니스 파트너의 생산, 서비스, 설계, 채굴, 조달, 운송, 보관, 원자재·상품·부품 공급, 상품 개발과 다운스트림 비즈니스 파트너의 유통, 운송, 보관 등을 모두 포괄한다. 공급 대신 활동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업시민성을 더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폐기(분해, 재활용, 매립 등) 부문은 실사 범위에서 최종적으로 빠졌다. 금융산업에 대해서는 격론 끝에 실사를 우선 업스트림에만 적용하고 발효 후 2년 내에 다운스트림으로 확대할지 재논의하기로 했다.
최종안이 금융업의 실사 대상에서 다운스트림 활동 사슬을 제외함에 따라 핵심 사업인 투자 및 대출 활동이 실사를 받지 않게 됐다. 금융산업에서 자금을 제공받는 기관의 인권·환경 침해 여부가 실사에서 빠졌다는 의미여서 결국 금융기관이 인권 침해 사업에 자금을 공급해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여전히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실사 항목은 크게 △인권 △환경 △기후변화 대응 목표 달성을 위한 전환계획 채택 및 실행 등 3개다. 실제 실사는 인권과 환경 두 부문에 집중된다고 보면 된다. 두 부문에 각각 16개 항목이 담겨 있다. 인권 실사 항목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아동권리협약, ILO의 핵심·기본 협약 등 인권 관련 국제협약을 바탕으로 한 생명권, 자유권, 노동권, 아동노동 금지, 노예제 및 강제노동 금지 등이다. 16개 항목 중 토지, 식수 등 기본권에 해당하는 환경적 권리 실사 항목은 2개로, 환경이 아닌 인권 부문에 포함되었다. 환경 부문에는 생물다양성, 폐기물, 오염물질, 오존층,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습지, 해양 등이 포함됐다. CSDDD는 EU ‘기업 지속가능성보고 지침(CSRD·Cor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에 따라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전환계획을 보고한 기업은 기후변화 대응 계획을 채택한 것으로, 또한 모기업의 기후변화를 위한 전환계획에 포함된 회사는 채택 의무를 준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지침을 위반하면 회사의 전 회계연도 전 세계 순매출액의 최대 5%를 벌금으로 물릴 수 있다. 후속 조치로 2027년 3월 31일까지 공시항목 관련 위임법을, 지침 발효 후 최대 36개월 이내에 기업의 실질적 실사 의무 준수 방법과 관련하여 일반·섹터별·특수 부정적 영향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예정이다.
CSDDD는 관보 게재 후 20일이 지나면 발효된다. 앞서 지난해 1월 CSRD가 발효돼 있어 유럽은 ‘기업지속가능성(CS)’ 제고를 보고(CSRD)와 실사(CSDDD) 양축 제도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셈이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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