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 머리개를 쓴 조선 여인과 표정이 지워진 흰색 마네킹.
1929년 한국인 최초로 개인 사진전을 연 정해창(1907~1967)은 조선의 미감을, 1966년 한국 여성 사진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연 박영숙(1941~)은 여성의 몸을 필름에 담았다. 정해창은 사라지는 것을, 박영숙은 불러내야 할 것을 사진으로 조명하고, 기록하고, 그렸다.
일제강점기 근대 지식인이었던 정해창은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카메라로 조선을 바라봤다. 그는 조선의 자연과 조선의 사람을 각각 산수화와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포착했다. 망태를 메고 새하얀 눈길을 걷는 아버지와 아들, 자신의 키보다 큰 나뭇짐을 진 지게꾼의 뒷모습 등 일제가 ‘근대화’란 이름으로 지우고자 했던 ‘조선다운 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여자는 언제나 미소를 지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뿌리 박힌 사회에서 살았던 박영숙은 여자의 무표정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 속 여자는 활짝 웃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던 시절에 그는 여성의 몸을 주제로 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일상과 감정을 포착했다.
그렇기에 신윤복의 <미인도>를 연상시키는 정해창의 단아한 조선 미인과 표정을 도려내 껍데기만 남은 듯한 박영숙의 <뉴 마스크>(1963)는 카메라 뒤의 인물이 ‘남자냐, 여자냐’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뛰어넘는다. 그들이 남긴 이미지들은 과거의 풍경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각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선구자적 시선이다.

조선다운 것과 삶의 현장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특별전 <광채 光彩 : 시작의 순간들>은 정해창, 임석제, 이형록, 조현두, 박영숙 등 한국 예술사진의 역사적 전환점을 만든 작가들을 조명한다. 우리나라 최초 사진 매체 특화 공립미술관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지난 10여 년간 192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에 제작된 작품과 관련 자료 2만여 건을 수집했다. 이를 통해 총 26명의 사진가 컬렉션을 구축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그중 5명 작품을 선보인다.손현정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지난 2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에서 사진이 예술로 자리매김한 순간들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각기 다른 정치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사진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등 독창적인 형식을 구축해 온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이며 사진이라는 매체가 시대의 감각과 사유를 어떻게 담아냈는지를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 5명을 선정할 때 역사적 순서가 아닌 다양한 사진 맥락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우선순위를 매겼다고 설명했다.
전시에서는 작가 다섯 명의 다섯 개의 시각을 볼 수 있다. 작가 각각이 포착한 얼굴만 봐도 시대상과 그 시대의 숨결이 느껴진다.
정해창은 당시 가장 서구적인 예술 방법이었던 사진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부채를 든 여인 등 가장 조선다운 이미지를 담아냈다. 그의 사진은 김홍도 등 조선 풍속화 거장들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는 사진에 낙관을 찍는 등 전통 회화의 요소들을 적용하면서도 초기 정물 사진에서는 서구 회화적 요소를 반영하는 등 조선인 최초로 사진으로 예술적 실험을 펼쳤다.

정해창보다 10년 뒤에 태어난 이형록(1917~2011)은 삶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지저분한 진창길 위를 뛰어가는 아이, 다 해진 신발을 신고 반짝이는 구두를 파는 거리의 구두상, 시장 좌판 위에 채소를 놓고 장사하는 여인들 등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서민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난의 삶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생명력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진에서는 애정 어린 시선이 가득하다. 어린아이가 동생을 업고 있는 사진에서는 당시 이른 나이부터 아이들이 짊어져야 했을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손 학예연구사는 리얼리즘을 말했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유리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아요. 가식 없는 서민들의 삶까지 사진에 솔직하게 담으려고 한 흔적들이 보이죠. 이형록은 신선회, 현대사진연구회 등 주요 사진 단체를 조직해 리얼리즘 사진의 초석을 마련했어요.”

검은 얼굴과 마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침묵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얼굴들도 사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임석제(1918~1996)는 사진으로 포착되지 않던 주변부 사람들의 얼굴에 카메라를 가까이 댔다. 그는 광복 이후 역사 속 이름 없는 소작농, 검댕 묻은 광부 등 노동자를 배경이 아닌 시대의 주체로서 사진의 정중앙에 세웠다. 소작농의 얼굴을 화면 가득 담은 <소작농강노인>(1946)의 눈가 주름과 미소에서는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티며 켜켜이 쌓여온 삶의 애환이 느껴진다. 탄광 노동자가 환히 웃는 순간을 포착한 <즐거운 한때>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고 언젠가 이를 극복하리란 희망이 반짝인다.

손 학예연구사는 “임석제는 1948년 광복 이후 한국 최초의 예술사진 개인전을 열어 전후 한국 사진계에서 리얼리즘 사진의 흐름을 여는 전환점을 마련했다”며 “특히 노동자의 삶과 시대 현실을 응시해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미학과 윤리를 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 작가 중 유일한 여성인 박영숙은 1980년대 강성 페미니스트 작가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그의 여성주의 시각은 1960년대 초창기 작품들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박영숙은 대학교 졸업 직후 여성지 <여상>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시와 사진' 연재를 통해 대중성과 실험성을 아우르는 작업을 선보였다. 1966년에는 이 연재를 위해 촬영한 사진들을 선별해 한국 여성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손 학예연구사는 “박영숙은 1960년대 여성 잡지 기자로 활동했으나 차별 등을 겪으면서 잡지사를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여성의 상품화가 일상적이었다. 박영숙은 늘 모델이 웃는 모습을 정면에서 찍는 비슷한 구도로 촬영하는 데 불만을 표했고, 권고사직을 요구받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녀>(1966) 등 작품을 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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