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대한민국 보수가 가야 할 길 ③
요즘 보수의 위기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유교적 전통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기독교 및 불교의 영향 등으로 인해 상당수 국민들의 성향은 여전히 보수적인데, 보수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은 보수 정치권의 몰락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보수의 위기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 논란과 이를 둘러싼 보수 정치권의 분열에서만 본다면, 진보가 득세하고 보수가 위축되는 것도 일시적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정당의 독주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의 본래 의미는 그것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는 특정한 이념적 성향이 아니라, 변화를 대하는 자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인간의 삶에서는 변화와 발전도 필요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안정성도 필요하다. 전자를 강조하는 것이 진보라면, 후자를 강조하는 것이 보수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는 서로 구별되지만 상대를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삶에서는 변화와 발전도, 안정성도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양자의 균형, 즉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필요하다. 안정성을 도외시한 진보도 국민들이 감당하기 어렵고, 변화와 발전이 없는 보수도 국민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스스로를 보수라고 표현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으며,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과거 영국에서 보통선거권의 확립이라는 진보적 이슈에 앞장섰던 것이 보수당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보수와 진보는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이념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대응의 적극성 정도로 구분될 뿐, 명확한 기준으로 양자를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군주제에 대립해서 시민혁명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당시에는 진보라고 일컬어졌고, 구체제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보수였다. 즉, 근대 시민혁명 당시에는 자유주의가 오히려 진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확립된 이후에 사회주의가 등장하고,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체제의 변혁을 주장하면서 자유주의는 보수로, 사회주의는 진보로 지칭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변혁이 주장되느냐에 따라서 사회주의가 보수로, 새로운 주장이 진보로 바뀔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수와 진보는 특정 이념과 동일시될 수 없다. 더욱이 대한민국의 양대 정당은 모두 보수정당일 뿐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기득권 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라면, 그 또한 나름의 일리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최근 보수는 수구(守舊)로, 진보는 곧 개혁과 민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왜 보수와 진보가 각기 의미를 갖는지, 양자의 균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의 부족, 나아가 보수의 가치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부족이 문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진보가 곧 민주이고, 보수는 수구라는 잘못된 프레임을 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가장 우선적으로 바뀌어야 할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보수 정당 및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며, 국민들이 어떤 점에서 보수 정치에 대해 불신과 불만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은 보수 정당이 악(惡)의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웰빙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선거에서 보수 정당보다는 진보 정당에 더 많은 표를 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후보자 개개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으며, 유권자마다 투표의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 자체에 대한 인상 내지 평가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 정당이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내세우지도, 실현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는 검증된 가치에 우선적 비중을 두면서 현재의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를 국민들이 지지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황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야 한다. 불만스러운 상황을 바꾸지 말자는 데 찬성할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바꿔야 할 것인가?
지금 국민들의 정치 성향이 과거 1960~70년대에 비해 진보 성향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비정상이다. 당시의 급변하는 경제적⋅사회적 상황에 비해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진입한 이후의 안정적인 상황은 국민들로 하여금 진보보다 보수를 지향하게 만들 수 있고, 고령화 사회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진보 성향이 강해진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우리 국민들은 여전히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며, 현실에 대한 불만, 더 개선된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강하게 품고 있다. 둘째, 이러한 국민들의 요구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 진보 정당이었다. 셋째, 보수 정당이 보수의 가치, 보수의 품격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들과 더불어, 특히 12⋅3 비상계엄 이후의 내부적 갈등과 구심점의 부재가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이제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보수의 가치를 분명히 하면서 국민들과의 공감을 형성해야 한다. 내부 갈등으로 스스로 지지 기반을 허무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희생과 봉사에 대한 자세의 변화가 필요하다. 2002년 불법 대선자금 문제로 보수 정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천막 당사를 치면서 국민들에게 호소했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민들이 보수 정당에 기대하는 것은 웰빙 정당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희생과 봉사, 헌신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사분오열되어 있는 정당이 어떻게 구심점을 찾을 것인지, 그리고 국민을 향한 진정성을 어떻게 국민들에게 전달할 것인지가 보수 정당의 생존을 판가름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비상임위원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 ▷전 국회 개헌특위·정개특위 등 자문위원 ▷전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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