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사진=CJ ENM]
"미국에서는 해고를 '도끼질한다'고 표현한다죠. 한국에서는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너 모가지야'."
산업 고도화는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일자리'라는 토대를 불안정하게 흔들어왔다. 키오스크의 확산, 자동화, 인공지능의 진보는 우리에게 편의를 안기는 동시에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각인시킨다. 오늘의 안락함이 내일의 생존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그 두려움을 가장 일상적인 장면에서 끌어올린다.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분)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아내 미리(손예진 분), 두 아이, 반려견과 함께한 일상은 충만했고, 이제는 '다 이루었다'는 만족감마저 느낄 무렵이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아든 해고 통보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석 달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하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1년 넘게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어렵게 마련한 집마저 잃을 위기에 놓인 그는 결국 경쟁자들을 제거해야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결심에 다다른다. 영화는 평범한 가장의 몰락을 치통처럼 스며드는 고통에 비유한다. 은근한 통증이 전신을 장악하듯 생계의 불안은 만수의 삶을 잠식하고, 관객은 그의 내면이 흔들리는 파동을 고스란히 체험하게 된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사진=CJ ENM]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초기작의 돌진하는 힘에 세련된 스타일리시함을 결합했다. 영화는 과격한 돌진과 역설의 리듬 위에서 기묘한 미장센을 빚어낸다. 특히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김창완의 '그래 걷자', 배따라기의 '불 좀 켜주세요' 같은 1980년대 대중가요가 작품 전반에 흐르며 키치한 무드와 결합한다. 불란서 주택과 브루탈리즘이 뒤엉킨 만수의 집, 분재로 채워진 온실, 기묘하게 배치된 공간들은 음악과 맞물려 우스꽝스럽고도 구슬프며 기괴한 풍경을 빚어낸다. 미술과 음악, 인물들의 행동이 얽히며 영화는 하나의 미술 작품처럼 형상화된다. 박찬욱·이경미·이자혜가 함께 구축한 시니컬한 태도는 이 비극을 한 걸음 물러서 관조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관객은 인물 어디에나 감정을 안착시키며 따라가게 된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감각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고통과 리듬을 생생하게 밀어붙인다. 이병헌은 만수가 느끼는 초조와 불안, 내면의 붕괴를 밀도 있게 끌어내며 관객을 파도처럼 몰아친다. 손예진은 만수의 아내 미리를 연기하며 파도의 흔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남겨지는 깊은 여운을 끌어올린다. 두 배우의 교차는 영화 전체의 정조(情調)를 지배하는 파도와 썰물의 리듬을 완성한다. 박희순, 차승원, 염혜란, 이성민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했다. 특히 이성민은 기존의 얼굴을 완전히 지우고 지질하면서도 연약한 속살을 드러내며 씁쓸한 인상을 남긴다. 염혜란 또한 전작의 이미지를 지우고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며 존재감을 발휘하고 박희순, 차승원은 단단하게 이야기의 주축으로서 중심을 잡는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사진=CJ ENM]
영화 속 중년 남성들은 단순히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가장'으로만 비춰지지 않는다. 지질함과 착각, 시대착오적 태도가 드러나며 블랙코미디의 풍경을 만든다. 현실적인 아내들의 모습은 가부장제의 허상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고 남성들의 지질한 착각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곧바로 씁쓸한 자기 고백처럼 되돌아온다. 만수가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도 그들과 묘한 공감을 나누는 순간은 비극적이다. 직업에 대한 사랑과 사회적 소외라는 공통의 경험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게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처절한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장인들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올드보이'부터 '헤어질 결심'까지 박찬욱과 오랜 호흡을 맞춰온 류성희 미술감독은 '불란서 주택' 양식에 브루탈리즘을 결합한 만수의 집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형상화했다. 온실과 정원, 분재는 그가 붙들고 싶은 삶의 풍경을 상징한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소재와 색채로 인물의 심리를 세밀하게 직조했고, 송종희 분장감독은 실직 전후 인물들의 미묘한 변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로 BAFTA 촬영·조명상을 수상한 김우형 촬영감독은 긴장과 유머가 교차하는 영상을 완성했다. 음악은 조영욱 감독이 맡았다. 런던 컨템포러리 오케스트라와 협업해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음악은 긴장과 해학을 오가며 극을 밀도 있게 채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사진=CJ ENM]
'어쩔 수가 없다'는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토론토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뉴욕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었으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으로 세계를 매혹시킨 박찬욱은 이번 작품으로 또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영화는 무너지는 영화계를 향한 은유이자 세대 교체의 흐름,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풍자로도 읽힌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보편적 불안에 대한 공명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작은 불안들은 연쇄적으로 이어져 거대한 파도로 밀려온다. 영화는 그 파동을 블랙코미디의 리듬으로 빚어내며 웃음 속에 씁쓸한 자화상을 담아낸다. 29일 개봉, 러닝타임 139분,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