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는 문화의 약점을 가리려 애써왔다. 식민지 경험과 전쟁, 분단과 독재, 급격한 산업화가 남긴 균열은 ‘설명해야 할 배경’으로만 취급됐다. 해외에 나갈수록 이 상처는 미화되거나 압축됐다. 슬픔은 인내로, 갈등은 극복 서사로 정리됐다. 이는 전략이었고, 한때는 유효했다. 그러나 세계가 성숙해질수록 이 방식은 힘을 잃는다. 미화된 상처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거리감을 만든다.
BTS가 선택한 길은 달랐다. 그들은 상처를 설명하지 않았고, 극복의 교훈으로 정리하지도 않았다. 불안, 좌절, 분노, 연대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감정은 정제되지 않았기에 진짜였다. 그리고 세계는 그 진짜 감정에 반응했다. 이 반응은 동정이 아니었다. 공감이었다. 공감은 설명에서 나오지 않는다. 드러냄에서 나온다.
보편성은 종종 ‘무색무취’로 오해된다. 세계에 통하려면 날카로운 개성이나 불편한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문화사의 경험은 정반대를 말한다. 미국의 블루스가 세계의 언어가 된 이유는 흑인 공동체의 고통을 지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문학과 영화가 반복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비극을 정리해 교훈으로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처를 끝까지 견디며 기록했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중립에서 나오지 않는다. 구체성의 끝에서 나온다.
K-헤리티지를 둘러싼 논의가 종종 관광과 홍보에 머무는 이유도 여기서 설명된다. 관광은 상처를 다루기 어렵다. 불편한 기억은 지워지고, 보기 좋은 장면만 남는다. 그러나 상처가 제거된 전통은 장식이 된다. 장식은 사진에는 남지만, 기억에는 오래 남지 않는다. BTS의 ‘아리랑’은 이 공식을 뒤집었다. 상처를 제거하지 않았기에, 장식이 아닌 경험이 됐다.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을 과시하자는 뜻이 아니다. 피해자 서사를 경쟁적으로 늘어놓자는 주장도 아니다. 그것은 정직한 기록의 태도를 말한다. 실패와 갈등, 부끄러운 선택까지 함께 남기는 태도다. 이런 기록만이 다음 세대에게 다시 읽힐 수 있고, 다른 사회와 접속될 수 있다. 상처를 지운 문화는 완결되지만, 완결된 문화는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BTS 이후 한국 문화가 직면한 과제는 분명하다. 우리는 상처를 관리의 대상으로만 둘 것인가, 아니면 창작과 기록의 자원으로 다룰 것인가. 불편함을 제거할 것인가, 감당할 것인가. 이 선택이 K-헤리티지의 성격을 결정한다. 설명 중심의 문화는 이해를 얻을 수는 있어도,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 반면 상처를 숨기지 않는 문화는 처음에는 낯설 수 있어도, 결국 신뢰에 도달한다.
세계는 한국의 아픔을 구경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 사회가 자기 아픔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본다. 회피하는가, 미화하는가, 아니면 기록하고 열어두는가. 이 태도가 곧 문화의 품격이다. BTS의 ‘아리랑’은 그 품격이 무엇인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상처를 숨기지 않는 문화만이 보편성을 얻는다. 이는 감상적 결론이 아니라, 이미 검증된 문화의 작동 원리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이 불편한 원리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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