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두고 ‘세계 속에 내던져진 존재’라 했다. 태어날 나라나 시대, 부모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 내던져진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다음이다. 그렇게 떠밀려진 삶일지언정 그 안에서 어떤 길을 갈지는 결국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내포한 이 통찰은 개인을 넘어 한 국가의 운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내던져진 국가’다. 분단과 전쟁, 냉전의 파고, 그리고 한·미동맹이라는 거대한 구조는 우리가 선택한 결과라기보다,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했던 출발점이었다. 이 냉혹한 현실을 부정하는 건 공허한 일이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는가.
실제로 우리가 직면한 ‘내던져진 조건’의 가장 위태로운 지점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서 드러난다. 미·중 간의 군사적 분쟁이 발생해 미군이 출동할 경우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국이 원치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안보 결정권이 타자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휘둘릴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국가의 실존이 시민의 선택에 상관없이 남들이 두는 거대한 체스판 위의 기물로 전락하는 가공스런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그동안 한국 외교는 늘 분주하게 무언가를 선택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그 선택지는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미리 그려져 있었다. 한·미동맹은 여러 정책 수단 중 하나이기 전에 움직일 수 없는 ‘전제’였고, 미국의 이익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 ‘우선 항목’이었다. 외교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대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거나 “동맹 관리가 우선이다”라는 말로 수렴된다.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는 ‘그들’(das Man)의 언어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타율적인 태도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진짜 위기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포기한 채 얻어내는 ‘안락한 순응’이다. 주체성을 잃은 존재는 잘못된 길을 가는 자가 아니라 아예 자기 길을 고를 생각조차 못 하는 자다. 지금 한국 외교가 마주한 본질적인 문제점 역시 정책적 실패라기보다 선택의 주도권을 차지할 생각을 버려온 과정이다. 1월 말 우리의 대미 투자입법 지연을 이유로 관세 협상의 합의를 깨려한 미국의 위협에서 보듯이, 상대가 판을 흔들어도 우리는 먼저 고개부터 숙인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찾는다.
이러한 패배주의의 기저에는 ‘전략의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 외교는 변화하는 국제 질서를 주도적으로 해석하기보다 기존의 강대국 질서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적응적 외교’에만 몰두해 왔다. 국익의 우선순위를 주체적으로 설정하지 못한 채 동맹의 요구를 국익과 동일시해온 것이다. 결국 위기 상황에서 협상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자기의 논리가 없으니 상대의 억지에조차 휘둘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패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반미가 아니다. 차가운 ‘계산하는 주권’의 회복이다. 우리가 동맹의 틀 안에서 침묵하는 것이 과연 전략적 인내인지 아니면 강요된 굴종인지를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국가의 실존은 우리 공동체의 명운이 걸린 결정에 대해 ‘왜’라고 물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증명된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국가에 주권은 작동할 수 없다. 타국의 의지를 대행하는 행정적 자동인형일 뿐이다.
자주독립국이 된다는 것은 동맹을 깨부수자는 얘기가 아니다. 진정한 동맹은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리는 주체적 결단 위에서만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다. 세상에 공짜 자율성은 없다. 불편함을 떠안지 않는 독립 또한 환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국을 불편하게 해선 안 된다’는 말을 마치 국가의 지상 과제처럼 되풀이한다. 이 지점에서 외교는 전략이 아니라 ‘관리’가 되고 국가는 주권자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한다.
하이데거의 동료였던 카를 야스퍼스는 인간이 진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을 ‘한계상황’이라 불렀다. 도저히 피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절벽 끝에서 인간은 비로소 깨어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동맹과 국익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 안보의 논리와 경제의 실리가 어긋날 때가 바로 그 한계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은 이 상황을 똑바로 마주하기보다 적당히 봉합하고 뒤로 미루는 데 급급했다. 갈등을 덮어두기에만 급급하니 국가는 조건에 적응하는 기술만 익혔을 뿐 주체자로 성숙할 기회를 놓쳤다.
야스퍼스는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했다. 결정을 외부에 맡기는 순간 실존은 사라진다. “미국이 원해서”라는 말은 상황 설명은 될지 몰라도 우리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자주독립국의 조건은 명료하다. 결과의 책임을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비록 그 선택이 실패로 끝날지라도 스스로 내린 판단이었다면 국가는 그만큼 성장한다. 반대로 성공처럼 보이는 종속은 결국에는 국가의 원동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는 더 날카롭게 꼬집었다.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다.” 침묵하고, 유보하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 모두가 실은 우리의 선택이다. 다만 주체적인 선택이냐 아니면 주어진 선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 외교는 오랫동안 후자의 ‘회피성’ 안락함 속에 머물렀다. 자유의 무게를 견디기보다 책임을 외부에 떠넘기는 편이 당장은 덜 무서웠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비판자 알베르 카뮈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부조리’라 불렀지만, 절망하는 대신 ‘절제된 반항’을 권고했다. 판을 엎어버리는 파괴 대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선을 긋는 태도다. 지금 우리 외교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태도다. 한·미동맹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지도, 그렇다고 적으로 돌리지도 않는 냉철함 말이다. 무조건적인 동조를 거부하면서 국익이 부딪히는 지점에서는 당당히 이견을 조율하는 ‘자율성의 연습’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율성의 연습은 현 세대의 안위를 넘어 미래 세대에 어떤 국가를 물려줄 것인가라는 실존적 책임감과 직결된다. 우리가 지금 ‘미국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내리는 도피적인 선택들은 훗날 후대들이 짊어져야 할 외교적 부채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당장의 갈등을 회피하기보다 원칙 있는 목소리를 내는 법을 익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던져진 조건을 극복하고 독립된 주체로서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국가의 성숙한 태도다.
따라서 앞으로의 한국 외교는 ‘수동적 관리’에서 ‘능동적 공간 창출’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동맹을 유지하되 그 안에서 우리의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원적 외교 자산을 확보하고,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유연한 실용주의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외교적 결단의 결과에 대해 국민과 소통하며 스스로 책임을 지는 ‘책임 외교’의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감정을 벗어난 철저한 계산과 주체적 의지가 결합될 때 한국은 비로소 강대국의 장기판 위에 놓인 말이 아닌 독자적인 플레이어로 거듭날 수 있다.
한국은 던져진 국가다. 처한 환경이 우리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던져졌다는 사실이 영원한 종속의 합리화가 될 수는 없다. 던져진 존재의 존엄은 그 조건을 어떻게 짊어지고 나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자주독립국이란 미국을 내쫓는 나라가 아니라 미국 앞에서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나라다. 이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던져진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선택하는 주역이 될 것인가.
필자 소개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약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에서의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의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의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의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지금은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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