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자 합의 이후 40년, '엔저=수출 호재'라는 일본 경제의 가장 견고했던 공식은 무너지고 있으며, 엔저의 파고는 사회 전방위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후쿠오카 파이낸셜 그룹의 사사키 도오루 수석 스트래티지스트는 "현재의 엔저가 일본의 경제력 저하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며 "엔화는 더 이상 리스크 회피 수단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엔화는 주요 통화 대비 가치가 반 토막 나며, 일본 사회 전반에 '통화에 대한 불신'이라는 전례 없는 균열을 만들고 있다.
표류하는 엔화의 파고는 일본의 자부심인 제조업 현장을 먼저 침몰시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이 소개한 전동공구 분야의 글로벌 강자 '마키타(Makita)'의 사례는 상징적이다. 마키타는 해외 생산 비중이 90%에 달해 대표적인 엔저 수혜 기업으로 꼽혔으나, 최근 엔화 가치가 1엔 떨어질 때마다 연간 영업이익이 약 7억 엔(약 66억원)씩 증발하는 구조적 모순에 빠졌다. 수입 부품과 에너지 단가 상승 폭이 수출로 얻는 환차익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기술력 하나로 버텨온 강소기업들의 비극은 더욱 처참하다. 독보적인 소아용 인공호흡기 기술을 보유한 '메트란(Metran)'은 최근 사실상 파산했다. 베트남 공장에서 생산하는 부품 대금을 달러로 결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엔저로 부품 수입 단가가 폭등했지만, 정부가 정한 의료 수가 체계 탓에 판매가를 올릴 수 없었던 '역마진'의 늪을 견디지 못한 결과다. 메트란의 창업자는 "작은 회사는 거대한 환율 변동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작업복 제조사 워크맨의 이즈카 유키타카 이사가 "더 이상 엔저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토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워크맨은 최근 4년간의 급격한 엔저로 해외 원자재 매입 비용이 폭증하자, 올해는 수입 결제용 달러 수요의 90%를 선물환 거래로 확보하며 환율 변동 리스크 차단에 나섰다. 도쿄상공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40%가 현재의 환율 수준을 '경영의 마이너스'로 꼽고 있다.
엔저가 만든 명암은 국경을 넘나드는 인적 흐름에서 가장 극명하게 교차한다. 지난달 도쿄 타카시마야 백화점 8층의 스포츠 브랜드 'On' 매장을 찾은 태국인 관광객 캄로포 씨는 "일본은 무엇이든 태국보다 싸서 좋다"며 10만 엔어치의 스니커즈를 쓸어 담았다. 당시 엔화 가치는 1 태국 바트당 5엔대로 떨어지며 3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면 일본 청년들의 해외 진출 문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에 따르면 2023년 해외 유학생은 8만 9000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보다 20% 가까이 급감했다. 교육계는 인적 자원의 '내향화'를 막기 위해 고육책을 짜내고 있다. 리츠메이칸 대학이 2억 6000만 엔의 긴급 지원금을 편성해 유학 비용 보전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이 대학 경제학부의 다나카 타이가 씨는 "대학의 지원이 없었다면 미국 유학을 포기하거나 대상국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유학생뿐만 아니다. 간사이 공항의 일본인 이용객 수가 코로나19 이전보다 30%나 급감한 가운데, 여행의 관문인 여권마저 갱신하지 않고 방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에 간사이 공항 측은 신규 여권 발급이나 갱신 비용을 현금성 포인트로 돌려주는 고육책까지 꺼내 들었다. "해외여행은 한 번 멀어지면 다시 해외여행에 나서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향 때문"이라는 것이 공항 관계자의 절박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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