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자투리 리뷰] 드라마 '허수아비'에 담긴 '값진 고구마', 다 삼켜낸 이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형사사건일 것이다. 1986년 첫 사건을 시작으로 1991년까지 이어진 10건의 여성 대상 강간·살해사건이, 2019년 마침내 진범이 밝혀질 때까지 33년 동안 미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년이 지나 발달된 과학기술 덕분에 진범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비로소 명칭이 바뀌었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드라마 ‘시그널’ 등 다수의 극에서 전반적으로 다뤄지거나 일부의 사건이 차용되었고, ‘그것이 알고싶다’ 등 시사프로그램에서도 적잖이 등장했다.

수십년 동안 미제사건이었던 탓에 이야깃거리가 넘쳤을 뿐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다양한 얼굴이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있다.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어느 새 당대 사회를 직시하게 되는 동시에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드라마 허수아비 사진KT스튜디오지니
드라마 '허수아비' [사진=KT스튜디오지니]

드라마 ‘허수아비’는 올해 4월 수많은 화제작들 사이에서 조용히 방송이 시작됐다. 이 드라마는 ENA 채널에 편생돼 2.9%의 시청률로 시작해서 12회로 종영하기까지 꾸준히 시청률이 올라 8.1%로 마무리됐다. 평일 드라마로는 놀라운 성적이다.
 
시청률을 견인할 톱스타 배우나 특별한 홍보도 없이, 스토리와 연기파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드라마 자체의 묵직한 힘만으로 거둔 성취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이 성과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드라마 '허수아비' 속 실화들
드라마 ‘허수아비’는 살인사건의 배경을 가상의 동네인 ‘강성’으로 옮겼다. 서울에서 좌천돼 강성으로 내려온 강태주(박해수) 형사가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이 연쇄살인임을 알아채고 수사를 시작한다. 이 연쇄살인 사건에 배정된 검사는 차시영(이희준)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강태주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했던 동창이다. 강태주는 아직도 그때의 트라우마로 악몽에 시달리고, 코피를 쏟고 혼절을 하기도 한다.
 
강태주와 차시영은 적대적으로 대립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공조를 하기도 하면서 살인범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과정에서 범인으로 몰린 다수의 용의자들이 경찰의 가혹행위로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풀려나기도 하고, 끝내 사망하기도 하고, 결국 구속돼 무기징역의 형을 살기도 한다.
 
잘못 잡아 넣은 용의자를 진범으로 만들려다가 그 과정에서 어리디 어린 8살의 아이가 실종됐지만 그 시신을 결국 찾지 못했고 억울한 그 용의자는 20년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냈다.
 
위 이야기는 실화에 기반한 것으로 실제 당시 연쇄살인 사건에 열루돼 20년을 복역한 윤성여씨의 이야기이며,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으로 알려진 김현정 양의 이야기다.
 
드라마 ‘허수아비’를 연출한 박준우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드라마가 윤성여 씨, 김현정 양의 사건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국가공권력의 처참한 민낯이 만들어낸 이 두 참극을 다루기로 한만큼 어둡고 민감한 이 이야기에 투자와 편성이 순조로울리 만무했다.
 
계속 미뤄진 편성문제는 이야기의 틀을 ‘좋은 놈과 나쁜 놈’의 대립구도로 정하고, 팽팽한 스릴러 장르물의 외피를 쓰기로 하면서 마침내 풀리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눈부신 열연 역시 이 드라마가 끝까지 완성될 수 있게 한 위대한 힘이다. 박해수, 이희준, 정문성 등 1988년과 2019년의 30년 세월을 오가는 고난이도의 연기가, 꾸역꾸역 고구마를 삼키는 듯한 답답한 스토리를 관객들에게 설득시켜준 최고의 수단이었다.
 
드라마 허수아비 사진KT스튜디오지니
드라마 '허수아비' [사진=KT스튜디오지니]
 
꾸역꾸역 고구마를 삼키는 듯한 스토리. ‘허수아비’에는 요즘 유행하는 ‘사이다’가 없다. ‘참교육’의 나화진같이 악인의 뺨을 후려치는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과 힘의 논리가 펄펄 살아 있는 1988년의 무자비한 시대. 드라마 ‘허수아비’에는 그 시대의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증거와 조사로 충실히 이뤄져야 할 살인사건의 수사에 승진, 포상, 좌천 같은 사건 외 사적인 손익 여부가 끼어들면서 수사는 엉망진창이 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이 고구마줄기처럼 엮여 끌려나온다.
 
이 부조리를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고 악전고투하는 강태주 형사의 활약은 그야말로 초라하다. 차시영의 국가권력 앞에서 번번히 주저앉는 강태주 형사의 수사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는커녕 임석만(백승환)을 범인으로 만드는 실책을 저지른다. 오히려 드라마의 히어로가 되어야 할 강태주 캐릭터는 용의자에게 잔혹한 폭력을 직접적으로 가하지 않을 뿐, 엄한 사람을 범인으로 몬 책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허수아비’ 속 고구마는 너무 퍽퍽해서 시청자의 목구멍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답답하다. 피해자의 고통은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진행중이고, 폭행을 자행하고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경찰들은 고위직을 거쳐 편안한 노후를 보낸다. 변절한 사람은 호위호식하고 진실을 호소한 사람은 외톨이가 되었다.
 
'허수아비'에 즐비한 고구마들, 값진 '목막힘'
또한 드라마를 통해 여러 의미의 ‘허수아비’를 본다. 범인이 피해자를 쫓아갈 때 위장의 수단으로 삼는 허수아비, 진실을 외면하고 눈앞의 이익에 눈 멀어버린 허수아비 같은 공권력, 범인 대신 만천하에 모욕당해야 했던 허수아비 용의자들, 결국 범인을 끝까지 잡지 못하는 강태주마저 허수아비가 된다.
 
최종의 허수아비는 ‘진실’이라는 단어다. 이 이야기에서 강태주나, 서지원(곽선영) 기자, 억울한 용의자들, 그리고 피해자들의 가족이 그토록 원했던 ‘진실’은 그야말로 무력하기 그지없다. 사건 이후 수십년이 지나 강태주가 차시영에게 “이제는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라”는 요구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게 끝내 요구하는 것이 ‘진실’과 ‘사과’라니. 약자의 요구는 너무도 작고 하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수아비’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은 사방 천지에 늘어져 있는 고구마 그 자체에 있다. 우리가 꾸역꾸역 넘기고 있는 이 고구마들은 그 자체로 국가 폭력이다. 시청자들은 그 국가의 무심함과 폭력성을 드라마를 통해 똑똑히 지켜본다. 이 드라마의 의미는 ‘목격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드라마 ‘허수아비’가 흥행을 위해 ‘히어로의 승리’, ‘진실의 쾌거’를 다루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승리의 위선이 없다. 드라마를 만든 박준우 감독과 이지현 작가, 그리고 참여한 배우들 모두 극적인 사이다물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피해자들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위장된 ‘권선징악’은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허수아비’는 시청자들과 그저 지켜보고 그 울분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책무를 다 하는 드라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값진 고구마’다. ‘허수아비’를 끝까지 함께 한 시청자들은 고구마의 목막힘에 기꺼이 동참했고 그 수치가 시청률로 나타났다. 누군가는 끝내 답답함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 아마 그것이 이 드라마가 남긴 기록일 것이다.
 
드라마 허수아비 사진KT스튜디오지니
드라마 '허수아비' [사진=KT스튜디오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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