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종족묘군(曹操宗族墓群), 즉 조조 가족의 무덤입니다. 직선거리 4km, 면적 10㎢에 걸쳐 19개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안내원의 한 마디에 취재팀의 입이 떡 벌어진다.
1974년 보저우현(시 승격이 전) 정부는 농지 정돈 및 도시화 건설을 위해 보저우 성 남쪽 일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개발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동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이를 계기로 1900여년간 숨어있던 조조종족묘군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도굴꾼의 습격을 받은 뒤라 무덤에는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무덤 주인의 신원과 신분, 근처 무덤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고증에 고증을 거듭한 끝에 조씨 가문의 ‘가족묘’임이 밝혀졌다. 조조의 증조부(曾祖父) 조절(曺節)과 조부 조등(曺騰), 부친 조숭(曺嵩), 사촌 조인(曺仁) 등이 이 곳에 묻혔음을 확인했다.
십여개의 무덤 중 취재진이 찾아간 것은‘둥위안(董圓)촌 2호묘'라 불리는 조조의 조부 조등의 묘였다.
후한의 환관 출신인 조등은 어린 나이에 입궁 해 30여년간 안제(安帝) 순제(順帝) 충제(衝帝) 질제(質帝) 환제(桓帝) 5명의 황제를 모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등은 환제 시기 태감(太監)에 올랐고 고급환관으로 분류되어 양자를 들일 수 있었는데 조조의 부친 조숭이 바로 그의 양자였다.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조등은 퇴궁 후에도 상당한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생전에 당시 보저우 성 남쪽 토지를 자신과 후대가 묻힐 곳으로 정했고 특히 자신의 묘를 위해 스스로 많은 준비를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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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입구 천정에는 본래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그림이 새겨져있었으나 지금은 희미하게만 남아있다. |
조등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자 두껍고 튼튼한 출입문이 나왔다. 문과 천정에는 부귀영화의 상징인 그림이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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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내부 주실 문 앞에서 바라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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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실에는 당시 시신이 안장되어있었을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
묘 내부는 조등의 관이 안치됐을 것으로 보이는 주실(主室)을 비롯해 총 7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심지어 사후 세계를 위한 화장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중 6개의 방은 석회암으로 만든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석회암은 본래 보저우에서 나지 않는 재료라고 한다. 거대한 크기와 묘 조성에 들어간 재료 등을 통해 조등묘를 짓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아부었을지 짐작이 갔다.
곳곳에 도굴꾼이 침입한 흔적이 남아있고 그들의 손에 위해 역사적 가치가 높은 매장품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옥의(玉衣)와 같은 귀한 유물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다고 한다.
누군가의 '지하세계'를 엿보는 일은 언제나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일. 한걸음 한걸음 주의를 기울이며 분묘 내부를 둘러본 취재팀은 다시 밖으로 올라와 외관을 살펴봤다. 입구 뒤 쪽으로 자리잡은 봉분들이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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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등묘 외부 모습. |
조조의 '뿌리'가 된 조등은 정통성을 부정한 조조를 꾸짖었을까, 후세에 간웅으로 회자되는 것을 안타까워 했을까. 무덤속의 조등은 손자와 후손들의 활약에 대해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지 상상하며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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