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47년으로 넘어오자 목당(牧堂) 이활(李活)의 주변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갔다. 영천 시골집을 불태운 뒤 명륜동의 담(潭)의 집애서 임시로 궁색한 살림을 꾸려가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사직동에 새로 집을 장만하고 양친과 자신 내외, 아들 병린(秉麟) 내외와 손자들해서 큰집 식구가 모두 같이 살았다. 더욱이 그 집은 가족 3대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 정도의 넓이와 체모를 지킬 만한 양관(洋館, 서양식으로 지은 집) 사랑채도 있는 집이었다.
둘째 동생 홍(泓)은 강원도 산업부장으로 있다가 농림부 양정과장으로 옮겨와 같이 서울에 있었고, 셋째 담(潭)은 영등포에서 산소공장을 경영하면서 상신무역(相信貿易)을 따로 차리고 있었고, 막내인 호(湖)는 경성 지방법원 검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도 사직동 집으로 이사하면서 안정을 되찾은 표정이었고, 이런 모습을 보는 목당 역시 오랜만에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 같아 가슴뿌듯한 데가 있었다.
목당은 무역협회에서 많은 실업가들과 격의 없이 사귈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은 이해관계를 떠나 목당을 대해주었고, 그래서 그 역시 부담 없이 그들과 소탈한 교제를 가질 수 있었다. 군자지교(君子之交)는 담여수(淡如水)라는 선비의 교제를 이상으로 하는 목당임에랴. 그가 이해관계에 사는 실업계 단체에 몸담으면서 이와 같은 담담한 교제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이러한 물질을 떠난 도학자적인 수신(修身)으로 얻어진 덕행(德行)의 소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회원이나 협회 직원들 할 것 없이 모두가 목당의 그런 인물됨을 알고 대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한 신비로운 일인 듯이 보이기도 했다.
목당은 또한 이런 처신 가운데서 어느 정도 회원들의 성분을 짐작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대체로 무역협회는 해방을 계기로 기회를 포착하려는 진취자본가(進取資本家)를 회원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 상공회의소(朝鮮 商工會議所)가 일제하에서도 일본 자본의 박해 밖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제약 및 매약업계의 중진인물인 유일한(柳一韓) 전용순(金用淳) 이동선(李東善) 등이 중심이 되어 영보(永保) 그룹의 이정재(李定宰), 경성방직(京城紡織)의 김용완(金容完) 등 보수파 민족자본가들의 협조를 얻어 결속을 굳히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산업경제의 재건과 독립촉성을 위한 정치활동 및 국민 외교 사업을 지침으로 삼은 데 대해 한국무역협회(韓國貿易協會)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색채를 띠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재계사(財界史)에서 특기할 사실인데, 5·16 군사혁명 후 많은 변질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오늘까지도 대한상의(大韓商議)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맥락은 보수 민족자본인 데 비해 무역협회(貿易協會)는 신진 자본을 맥락으로 하고 있다. 즉 신진 자본의 본산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전통은 대한상의가 전용순 회두(會頭)에 의해 형성된 집단인데 대해 무협(貿協)은 처음부터 회원들의 협회로 출발하였다는 데 있다.
이것은 영국에서 민주주의를 체득한 상산 김도연과 영국에서 민주주의를 몸에 익힌 목당 이활의 두 콤비가 창립을 주도하고 이끌었던 데 있었다. 특히 2~3대에 이어 8~13대에 이르는 목당의 장수 회장 역임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초기 무역협회의 발언권은 신흥자본가들이라고 하기보다는 일본 자본의 틈바구니에서 시련을 겪어 온 소장 세력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활발하게 등장했던 상사로서는 동아상사(東亞常事)의 이한원(李漢垣), 김인형(金仁炯), 장건식(張健植) 팀과 삼흥실업(三興實業)의 여선하(徐善夏), 최태섭(崔泰涉) 팀, 그리고 대한물산(大韓物産)의 김용주(金龍周), 김용성(金龍成) 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화신산업(和信産業)의 박흥식(朴興植), 태창직물(泰昌織物)의 백낙승(白樂承), 대한산업(大韓産業)의 설경동(薛卿東) 등 실력 있는 자본가들의 협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전자가 집중적 이익 표명을 앞세웠던 데 대해 자본력을 배경으로 독자적인 이익활동을 전개하는 그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숫자로 보면 대다수 회원들이 전자에 속했으므로 협회는 자연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이다.
목당은 이들 개개인을 나름대로 관찰하고 판단하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협회 운영자의 입장이 아닌 인간적인 면에서 이들을 비판의 눈으로 보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의 좌우명(座右銘)이 공즉불모(恭則不侮, 공손하면 뉘우치지 않으며) 관즉득중(寬則得衆, 너그러우면 사람들이 따른다)이 아니던가. 이는 물론 일종의 처세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목당에게 이것은 인격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동아상사를 설립하고 이끌었던 이한원은 중국에서 점령지 무역을 해왔던 뱃심 좋고 통이 큰 야심가로서 김인형 장건식 한통숙(韓通淑) 등 인재들을 주변에 거느리면서 무역협회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한 회원에 속했다. 그리고 김인형은 도쿄상대(東京商大) 출신으로 미쓰비시상사(三菱商事) 경성지점에 있다가 해방을 맞아 정부 무역을 대행하려는 의도로 대한상사를 설립했으나 여의치 않은 중에 이한원과 가까워진 인물로 세련된 신상(紳商, 대상인)이었다. 그는 정부 대행 형식으로 일본에 가마니 수출을 실현시킴으로써 최초로 대일무역 통로를 개척한 사람이기도 했다. 또 장건식은 상하이대학(上海大學)을 나온 국제통으로서 영어에 능한 재치 있는 활동가였으며, 뒷날 국방부 구매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통숙은 경성법학전문(京城法學專門, 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와 고문(高文,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수재로서 태평양전쟁 때는 점령지 행정관으로 중국대륙을 누비다가 이한원과 손을 잡은 인물이며, 허정 교통부장관 밑에서 비서실장으로 있었고 민주당 정권 때는 체신부장관을 지냈다. 또한 이한원은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기업철학으로 업체에 활기를 불어넣은 기업가이다.
여선하 최태섭 오천석(吳天錫) 박창일(朴昌溢) 팀은 삼흥실업을 설립하고 나섰는데 여선하는 중국에서 활약하던 실업가이고 최태섭 역시 만주에서 활약하던 실업가인데 원만한 외교자세로 기반을 굳히었다. 이들 중 여선하는 민주당 정권과 밀착하면서 재기를 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여 재계에서 사라졌지만, 최태섭은 관서(關西) 기독교계 자본과 손을 잡고 한국유리공업으로 재계의 발언권을 행사했다.
이밖에 중일전쟁 때인 1940년대에 잠시 점령지구 무역의 조정기관으로 중국 톈진(天津)에 동화산업(東華産業)이 지정된 적이 있는데 그 동화산업의 주인공 장기식(張驥植) 사장은 삼성무역(三星貿易)이란 간판을 가지고 협회에 참여했다. 일본이 북부 중국을 점령하면서 만주와 북부 중국의 중간지점인 산하이관(山海關)애 잠깐 세운 일이 있는 익동정권(翼東政權, 왕징웨이(汪精衛))을 상대로 톈진에 동화산업(전액 조선총독부 출자)을 설립하여 점령지 무역의 창구역할을 하게 했을 때, 그 업무를 전담했던 인물이 바로 장 사장이다. 그는 특히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 현 단둥)에서 환전상(換錢商)으로 성공하여 일본 관동군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해방 후 남대문로에 삼성무역을 차리고 의욕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6·25 남침 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쨌든 이들 소위 대륙파(大陸派) 자본(資本)이 협회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일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 견제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대한물산의 김용주, 건설실업(建設實業)의 김익균(金益均) 등 소위 진취자본을 대표하는 일련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초기 무역은 일종의 시험 무역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고 무역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과도기에 불과했다. 초기의 정크 무역(貿易)에서는 고작 마카오·홍콩무역기(貿易期)에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무역상은 역시 해방 전부터 활약해 오던 화신산업의 박흥식과 태창직물의 백낙승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한때 금익통상(金益通商, 강익하(康益夏))과 삼양무역(三洋貿易, 김규면(金奎冕)) 등도 활약했지만 멀지 않아 뒤처지고 말았던 것이다.
거래 실적면에서의 제1위는 삼흥실업이었다. 자본금 5억원의 회사로 홍콩에 수산업·광산업·황모(黃毛, 족제비 꼬리털)·돈모(豚毛, 돼지털) 등을 수출하면서 생고무·지류(紙類)·면사·화공약품 등을 수입해오고 있었는데 돈모 소출은 삼흥실업이 처음으로 개척한 품목이었다.
대한물산은 홍콩에 오징어·마른 대구 등을 수출하면서 인견사(人絹糸, 인조견사. 천연 섬유소로 명주실 비슷하게 인공적으로 만든 실)·신문용지·생고무 등을 수입했고, 건설실업의 김익균도 수출 규모에서 상위를 다툰 상사였는데 한천(寒天, 우무를 동결탈수하거나 압착탈수하여 건조시킨 식품)·오징어·중석 등을 수출하고 가성소다·생고무·신문용지 등을 수입했다. 동아상사는 업계의 선두주자(先頭走者)로 나섰으나 첫 수출무역이었던 당삼(糖蔘, 설탕을 넣고 가공한 인삼) 수출의 실패로 기복이 컸다.
정크 무역기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직접 중국을 내왕한 업자로서는 화래무역(華萊貿易)과 열신공사(悅新公司)를 들 수 있다. 화래무역의 김동환(金東煥)은 1946년 3월 중국 톈진에서 돌아올 때 정크선(船) 3척에 땅콩·당면(唐麵)·유리 등을 싣고 옴으로써 정크무역을 시작했고, 열신공사의 이순우(李淳雨)는 1947년 4월, 72t의 정크선에 오징어와 한천 등을 싣고 톈진에 기항했다가 입국허가를 얻지 못하여 상하이(上海)로 되돌아갔으나 그곳에서도 입국불허(入國不許)로 홍콩으로 가서 간신히 입국허가를 얻어 짐을 출 수가 있었다.
이 해 8월 27일 홍콩에서 아이비스 호(號)가 처음으로 생고무·인쇄기·염료·원면·소금·성냥 등을 싣고 부산항에 입항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홍콩 무역이 열리고 부산항이 무역항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개척기 무역협회에 주어진 이와 같은 일은 업계가 그때그때 부딪치는 애로사항을 협회가 앞장서서 타개해 주는 데 있었다. 협회의 중요 업무는 임원회의 결의로 집행한다는 회칙에 의해 엄격히 준수되었고, 임원회는 회원상사 중에서 선출된 이사들이 중심이었으므로 실제로 이사회가 결정한 것을 무역협회 임원진이 집행하는 그런 조직이었던 셈이다. 그렇데 되자 협회의 임원진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책 결정기관의 교섭을 전개하게 마련이었다.
주로 이 역할은 상무이사에 주어진 일임에도 목당은 그런 재간을 갖지 못했다. 경제적 이익집단과 정책 결정기관의 교섭은 단체 대표와 정책 당사자 간에 행해지는 것이 바람직한데 우리나라엔 오히려 개인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고 보면, 상무이사는 폭넓은 교제망과 능란한 사교 솜씨를 가져야 했다. 그리고, 의리나 인정이란 것도 큰 역할을 하게 마련으로서 학벌 따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목당은 처음부터 상무이사로선 적격자가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원래 이런 인물 주변에는 또 그를 보완해 주는 유능한 일꾼들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그 일꾼이 바로 앞서도 말한 조사부장 나익진(羅翼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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