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민주화
한·중·일 세 나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길 떠난 나그네가 자는 곳에서 세 나라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중국은 반점(飯店)이다. 먹고 잔다. 일본 료칸(旅館)은 어디나 목욕탕이 있다. 씻고 잔다. 한국은 주막(酒幕)이다. 한 잔 마시고 잔다.
중국인에게 먹는 것은 사는 법이다. 거듭되는 전란과 반복되는 홍수 가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씻는 것은 사는 길이다. 전염병과 식중독이 만연한 습한 기후에서는 씻어야 사는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물산이 풍족한 한국은 풍류와 멋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글씨도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한국은 서예(書藝)로 부른다.
밥 먹는 방식도 다르다. 중국은 둥그런 탁자에 음식을 올려놓고는 각자 덜어 먹는다. 일본은 이치닌마에(一人前)이다. 각각의 몫을 따로 차려 먹는다. 우리는 나눠 먹는다. 찌개에는 네 숟가락도, 내 숟가락도 들어간다. 생선의 경우는 내 젓가락이 잡고, 네 젓가락이 뜯어낸다. 함께 더불어 나누어 먹는 것이다.
우리에게 밥상은 이렇게 가족임을 확인하는, 공동체임을 일깨우는 시작이자 마침표 제의(祭儀)이다. 최근 한 매체가 소개한 전북 부안여중 이슬양이 초등학교 시절 쓴 시 ‘가장 받고 싶은 상’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이양의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더는 밥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희망이 요리사인 것도 언젠가 어머니에게 밥을 차려드리고 싶어서다.
밥은 이렇게 몸으로 들어가 마음이 된다. 몸과 마음으로 사람이 된다. 밥은 나이고 너이며, 우리이다. 동시에 하늘이다.
성경이 전하는 예수의 기적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게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다. 어린아이가 싸온 점심 도시락이 떡 다섯 덩이와 말린 물고기 두 마리다. 이로써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오천 군중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이를 현대적으로 보면 이렇다.
당시는 자기 도시락을 스스로 마련해 들고 다니던 시기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러 온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부자들은 넉넉하게 차려왔으나, 가난한 자는 물만 챙겼을 것이다. 점심때에 이르러 부자들은 식사를 하고 음식이 남았지만, 그렇다고 이웃에게 나눠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시대 관습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풀어 이웃과의 나눔을 축복한다. 그러자 너도나도 싸온 음식을 공유의 마당에 펼쳐 놓았고, 군중 모두가 먹고도 오히려 남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밥상 나눔’을 통한 천국의 임재를 가르친 것 아니겠는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더불어 사는 사회’, 즉 경제민주화의 원관념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主祈禱文)을 가르쳐 주는데,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길 바라며 첫째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굶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것이며, 매일 굶지 않고 먹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라는 이야기다.
‘밥이 곧 하늘’임을 선언한 것이다. 하늘은 혼자 독점할 수 없다. 따라서 밥도 혼자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도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 같다고 한 배경이다.
현재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가 ‘밥상 나눔’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천국’을 강조하던 시절보다 나아졌을까. 오히려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중학생 이양은 어머니의 밥상이 그리웠지만, 우리 사회에는 생계를 위한 ‘밥상’이 시급한 소외계층이 허다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나눔’과 ‘공유’이다. 밥상 공동체는 경제민주화의 지향점인 ‘더불어 삶’의 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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