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구의 과학과 문화] 과학은 경제에 기여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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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위원
입력 2017-12-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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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위원]


대한민국 헌법 127조 1항엔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국가통치의 기본원리와 국민 기본권에 관한 근본법규인 헌법에 과학기술 관련 내용이 포함된 것은 과학기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조항에 한 과학기술인단체가 딴지를 걸고 나섰다. 문제의 단체는 440여명의 회원이 참가하고 있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이하 ESC)’란 단체다.

ESC는 지난달 25일 ‘4차 산업혁명시대? 과학기술과 헌법’ 포럼을 열고 헌법 127조 1항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헌법 개정을 촉구했다. 왜일까. 이 포럼의 발표자, 토론자들은 한목소리로 과학기술은 사회문화, 환경보전, 삶의 질 등을 포괄하고 있는데, 단지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과학기술의 역할을 한정짓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ESC의 윤태웅 대표는 “해당 조항이 경제 분야인 제9장에 있는 것은 문제”라며 그 대신 “제1장 총강에 ‘국가는 학술활동과 기초연구를 장려할 의무가 있다’라는 조문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SNS를 통해 온라인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역할과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정부가 근대적인 산업화에 나선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분단,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격변을 거치면서 산업화의 기반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대한민국이 경제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60년대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민주당 정권이 만들어 놓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토대로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1962~1966) 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1986년까지 다섯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유례 없는 경제성장을 이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경제개발의 가장 중요한 축이 과학기술이란 사실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난 이듬해인 1967년, 정부는 과학기술진흥법을 만들었고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종합정책과 계획을 수립한다. 사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과학기술진흥법과 정책은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수립된 것이다. 모두에 언급한 지금의 헌법조항은 이런 문제의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과학기술진흥이 경제개발에 기여해야 한다는 1960년대의 문제의식이나 과학기술혁신이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현행 헌법의 문제의식은 본질적으로 똑같다.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에 기여해야 하는가. 응용과학에 해당하는 기술의 경우에는 과학원리를 바탕으로 신기술을 개발하고 신산업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므로 경제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과학은 그렇지 않다. 물리, 화학, 생물, 천문학 등 기초과학은 먹거리를 창출하거나 국민경제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보편진리나 법칙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을 말한다. 보통 자연과학을 가리키지만 넓은 뜻으로는 논리와 체계를 갖춘 모든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현생인류의 학명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인간’이란 의미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발전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혁명이다. 인지혁명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 우주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를 둘러싼 세계, 호모 사피엔스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원리를 밝혀냈다. 그렇게 알아낸 원리, 정보를 축적해 지식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후손에게 전달해왔다. 결국 이런 능력이 과학과 지식, 학문을 만들어낸 것이다. 호기심과 탐구정신을 가진 인간이 세대를 거치면서 물질세계와 생명체의 원리 그리고 우주의 신비를 밝혀온 것은 인간 본성의 발현이자 인류의 지적 활동이다.

이러한 지적 활동을 먹고사는 경제 문제에 가둬둘 수는 없다. 호기심을 갖고 과학연구를 하는 것이 기술개발과 신제품 발명에 활용돼 결과적으로 경제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이는 과학의 방대한 역할 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 경제가 물질영역이라면, 과학은 정신영역이다. 과학은 지혜로운 인간의 고도의 지적 활동이므로 경제보다는 문화에 가깝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인지하고 세계의 원리를 알아내는 것이 당장 돈을 벌게 해주지는 못한다.

과학은 경제를 넘어서는 인간문명의 자산이다. 개헌이 필요하면 해야 한다. 이왕 개헌을 할 거라면 우리 헌법에 인류문명사적 관점에서의 과학과 기술의 역할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담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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