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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등장한, 박헌영의 아내] 당대 얼짱 주세죽의 '몸부림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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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 기자
입력 2017-12-2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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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3편의 주인공, 국립현대미술관 '신여성전'에서 사진 전시

  • 3.1운동 때 수갑찬 손으로 경찰공격…러 수도원 납골당 묻혀

 

[ 1921년 중국 상해, 1925년, 1928년 9월, 1929년 8월, 1938년 무렵, 1945년의 주세죽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사진=임경석 제공]


살아생전에도 사후에도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조선 여성이 있다. 심훈의 <동방의 애인>, 손석춘의 <코레예바의 눈물>을 비롯해 조선희의 <세 여자>에 등장하는 그녀.  문학작품에 이어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전시장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신여성전’의 주인공 중 하나다.

실제 인생은 브라운관이나 소설이나 사진 속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했다. 그녀의 이름은 주세죽(朱世竹, 1901년 6월 2일 ~ 1953년).

조선의 혁명운동을 이끌고 훗날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이 주세죽의 첫 남편이다. 그녀를 박헌영의 아내로만 수식하긴 부족하다. 주세죽은 요즘시대로 말하자면 ‘금수저’다. 그녀는 함경남도 함흥의 부잣집 딸이었다. 당시 관북 제일의 명문고이자 최초의 여성중등교육기관인 함흥 영생여학교를 2년간 수학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이 1921년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해외유학도 떠났다. 상하이에 있는 안정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영어도 배웠다. 절대음감의 소유자로 음악에 비범한 재능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살았던 일제강점기 여성중등교육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엘리트교육이었다. 1944년 총독부의 자료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한 여자 수는 102명이었다. 전체 여성 가운데 11%만이 간신히 제도교육을 경험할 수 있었다. 유학파 출신의 여성은 더더욱 드물었다. 게다가 주세죽은 소설가 심훈이 “대리석으로 깎은 얼굴”이라 말할 만치 당대 손꼽히는 미녀였다.

그녀가 단순히 예쁘고 똑똑해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그녀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학자들은 주세죽이 유학시절 박헌영을 만나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내조에 전념했던 수동적 여성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주세죽의 이력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주세죽은 빨간 줄을 지닌 여고생이었다. 18살 때 3.1 운동을 기획하다 함흥경찰서에 감금되었다. 이곳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수갑을 찬 손으로 경찰을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치 ‘센’언니였다.

주세죽은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당대 최고의 여성사회주의자였다. 당대 남성 혁명가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보단,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신념과 의견을 피력했다. 나아가 국내외 사회운동의 전면에 서기도 했던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사회주의 운동가다. 일본 식민지시대 사회주의자 여성은 마르크스 걸, 엥겔스 걸, 혹은 레이디 레닌이라 불렸다. 남성을 혁명가라 칭하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여성들의 남성 혁명가들의 성적 파트너 역할 혹은 애인과 같은 연애사와 외모, 사생활에 모아졌다. 이는 ‘어떤 인물’이 아닌 ‘누구의 여자’라는 틀에 고착되었다. 주세죽의 첫 남편이었던 박헌영의 사랑이 당시 신문에 연재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것이 그러했다. 소설가 심훈의 연재했던 것으로 <동방의 애인>이라는 소설로 발간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소설이 발간되고 4년 뒤 주세죽이 박헌영의 절친한 친구인 김단야와 재혼하자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념은 그녀를 살해했다. 그녀가 생을 바쳤던 사회주의운동은 그녀를 벼랑 끝에 몰았다. 남한으로부터는 공산당이라 불리는 박현영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북한과 소련에서는 김단야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카자흐스탄의 모래사막 크즐오르다에서 5년간 유배되고 이 과정에서 아들을 잃었다. 봉제공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모스크바로 딸을 찾아다니다 쉰둘에 사망했다.

사후에 주세죽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소련 정부는 1989년에 사면장을 발급했다. 10년 전인 2007년 한국정부는 대한 건국훈장애족장을 발족했다. "빨갱이에게 훈장이냐"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주세죽은 여전히 고향 땅을 밟지 못한다. 그녀의 유해는 현재 모스크바의 시내의 단스키 수도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녀가 사랑했던 이념으로 빚어진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소련에서 무용수로 활동했던 주세죽의 딸, 박 비비안나(1928-2013). 주세죽의 묘비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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