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좋아하고 잘생긴 남자 선배에게 가슴 설레는 연희는 지극히 평범한 87학번 대학 신입생이다. 구멍가게 ‘연희네 슈퍼’에서 엄마와 외삼촌과 함께 사는 그는 교도관인 외삼촌의 부탁으로 옥중서신을 대신 전할 정도로 당차지만, 달랑 셋뿐인 식구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위험한 일을 벌이는 삼촌이 마뜩잖다.
입학 직후 첫 미팅을 하러 간 명동 거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휘말린 연희는 난생 처음 독한 최루탄에 휩싸이고 위험한 데모를 이어가는 동아리 선배와 친구들을 보며 외삼촌을 떠올린다. 그들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참여할 수 없는 정말이지 평범한 아이. 연희는 그 시절, 우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87’(감독 장준환)은 1987년 1월, 스물두 살 대학생이 경찰 조사 도중 사망하고 사건의 진상이 은폐되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기 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배우 김태리(28)는 이번 작품에서 87학번 대학 신입생 연희 역을 맡았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태어났지만 그 시절과 꼭 닮은 촛불광장을 겪은 세대로 연희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다고. 아주경제는 1987년 그리고 2017년을 관통하는 연희를 연기한 김태리와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저 역시도 광화문 촛불집회를 겪은 세대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6월 항쟁을 겪는 연희의 마음이 모두 공감이 갔어요. 애초에 감독님께서도 저를 처음 만나 저와 연희가 어떤 면으로 부합하는지 보고, 제 얘기를 많이 들어주셨어요.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찾아갔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 분)을 비롯해 부검을 밀어붙이는 서울지검 최검사(하정우 분), 연희의 외삼촌이자 옥중서신을 전달하는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분) 등 대다수 캐릭터가 실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연희는 유일하게 실제 모델이 없는 허구의 인물이다.
주인공 없이 릴레이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영화의 구조에서 관조적 시선이 체험의 시선으로 전복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허구의 인물, 연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화자의 입장에서 연기적인 접근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중요한 캐릭터고 그에 맞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왜 중요하냐’고 한다면 가장 평범한 보통의 사람 즉 군중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2017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캐릭터 아닐까요?”
1990년 출생인 김태리에게 1987년의 풍경은 다소 낯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과 2017년이 멀지 않게 느껴진다며 국민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되찾아가는 과정에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정말 닮아있었어요. 정치 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덮어두고 국민들을 속여 왔죠. 그에 대한 분노, 사라져버린 믿음 등이 그 시절과 2017년이 비슷했어요. 외국에서도 흔치 않은 대규모 시위기도 하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일 수도 있고 내 옆에 누군가일 수도 있는 꽃다운 청춘이 진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 큰 줄기를 이룬 것 같아요.”
실존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김태리는 장준환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연희를 만들어가야 했다.
“감독님과 시나리오를 훑으면서 장면 장면마다 이야기를 나눴어요. 어떤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가치관 같은 것들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지를. 캐릭터의 전사 같은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시나리오에) 나오지 않았지만 유추할 수 있게끔 되어있어서 저 혼자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처음 만나 호흡을 맞춘 장준환 감독은 어땠을까? 김태리는 “화법이 굉장히 특이하고 매력적”이라며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보셨어요? (장 감독은 아내이자 배우인 문소리가 연출한 ‘여배우는 오늘도’에 출연한 바 있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랑 똑같아요! 하하하. 사무실에서 만난 감독님과 영화 현장 속 감독님은 조금 달랐어요. (현장이) 더 열정적이고 치열하셨죠. 절대 대충대충 하는 법이 없어요. 끝까지 물고 늘어지시죠. 제 생각에는 정말 쉽지 않은 일 같거든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정말 좋았어요. ‘진짜 제대로 만드셨구나’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고민하고 노력했던 이유가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그러셨구나’ 싶어서요.”
극 중 연희는 첫 미팅을 나가던 도중 시위대와 얽혀 최루탄에 휩싸인다. 이때 동아리 선배에게 도움을 받게 되고 조금씩 마음을 터놓으며 1987년 흐름을 바꾸는 데 일조하게 된다. 연희에게 이 동아리 선배라는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는 ‘파트너’다. 그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한 걸음 세상 밖으로 나가기 때문. 특히 상대는 故 이한열 열사를 모델로 해 화제를 모았다.
“동원 선배님과 연기 호흡을 맞출 수 있어서 좋았어요. 대기 하면서 선배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알고 보니까 제가 선배님의 출연작을 많이 보지 못했더라고요. 그야말로 연기 하시는 걸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좋았어요. 정서를 기운으로 잘 풀어 가시더라고요. 연기라기보다는 그 아우라? 감성이 들어있다고 해야 하나? 공부를 많이 하시고 철저하게 준비했으니까 슬픔이 들어있었던 거 같아요. 카메라를 가져다 대면 흘러나오는 기운들이 참 좋았어요.”
영화 공개 후 우려의 목소리도 들렸다. 연희와 동아리 선배 즉 이한열 열사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러브 라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이는 걸 꺼렸어요. 감독님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길 원하셨거든요. 이 사람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감정 또는 기운들을 표현하길 바라셨어요.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상 연희와 선배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넣다 보면 전체적으로 흐트러진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연희가 선배의 신발값을 대신 치르겠다고 했던 건 반해서라기보다 구해줘서였다는 게 맞아요. 당찬 느낌을 살리고 싶었어요.”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로 데뷔, 단박에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태리의 2018년은 다소 바쁠 계획. 올해는 더욱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라며 해사하게 웃었다.
“임순례 감독님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이 끝났어요. 올해 봄에는 만나게 될 거예요. 또 드라마는 지난해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드라마 촬영으로) 매우 바쁠 것 같아요. 더욱 활발하고 자주 관객분들과 만나게 될 것 같네요.”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