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2)] 김교신이 죽자, 자신이 죽을 날을 정한 류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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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6-2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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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년 정신적 사제(師弟)… 류영모의 길 김교신의 길(1)

[김교신(1901~1945)]


그리스도 인연 끊겨도 조선은 사랑할 것

1937년 12월 15일 성서조선 108호 제작을 끝낸 뒤 김교신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출판 허가원을 낸다. 오후에 전화를 받았다. "1938년 신년호 첫머리에 황국신민서사를 실으시오." 순간 김교신은 이런 요구를 듣느니 차라피 폐간을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수정을 했다. 그런데 경무국에서 다시 원고 내용을 고치라고 했다.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중에서 "만일 이 만유인력이 전광 사이에서 동하지 않게 된다면 이 우주는 혼돈에 빠질 것이다. 그때에는 히틀러의 허리에 찼던 칼도 제대로 있을 수 없고 공중에 날아가 버릴 것이며 무솔리니의 군함도 영원의 암연에 빠져버릴 것이고 대영제국도 로키산맥도 없어질 것이다"라는 문장을 표시한 대로 수정하고, 제목에 있는 '동경은 광야 또는 피난처'라는 말도 바꾸시오."

1938년엔 일본 황민화정책 슬로건을 잡지의 권두 페이지에 계속 실으라는 주문이 왔고, 1939년에는 신년호 기사에 대한 경무국의 신방침을 반영하라고 요구했다. 김교신은 다시 폐간 결심을 하고 임시휴간통지서를 냈다. 그런데 만주의 소학교 학생의 편지를 받았다. 학생들이 돈을 모아 8원20전을 만들었는데, 성서조선에서 소록도에 보내주시고 그 기사도 써주기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김교신은 감격했다. "나환자에게 위로가 된다면 세상의 조롱도 견딜 만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버텨 1942년까지 왔다. 3월 30일 아침 개성 송도중학교에 등교하는 김교신에게 일본경찰이 다가와 동행하자고 했다. 학생들 때문에 수갑을 채울 것을 망설이는 경찰에게 김교신은 법대로 채우라고 손을 내밀었다. 우선 성서조선 3월호의 '조와(弔蛙)'를 문제 삼았다. 살아남은 개구리가 조선 독립운동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김교신에게 형사는 물었다.
"민족 의식이 있나?"
"정치적인 뜻이라면 없고, 조선사람임을 의식하느냐의 뜻이라면 물론 있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는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믿느냐?"
"그렇다."
"일본 천황도 하나님이 창조했느냐?"
"그렇다."
"나는 조선의 유명인사 모씨를 전향시킨 내력이 있다. 너도 전향할 뜻이 없는가."
"나는 유명하지도 않고 아무런 큰 일도 한 일이 없다. 그러니 전향할 처지도 아니다."
"만주사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이 마치 호랑이를 올라탄 것과 같다. 섣부른 짓을 저지른 것이다. 타고 가도 결국 물려죽고 도중에 뛰어내리지도 못할 딱한 사정에 있는 것이다."
"황국신민서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어지는 경우가 있어도 나는 이 조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황국신민서사는 후일에 망국신민서사가 될 날이 있을 것이다."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업하다

1943년 3월 9일 그는 함석헌, 송두용과 함께 석방됐다. 옥살이를 한 지 1년 만이었다. 그들에게 비교적 관용을 보였던 후지키 검사는 성서조선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불기소 처리했다. 그러나 출옥한 김교신은 1년 전의 일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송도고보의 교단에 설 수도 없었고 성서조선을 복간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일제는, 식민지의 종교인인 그에게 신사참배 정책에 위배되는 길을 가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못 만난 지인들을 방문해 만난 뒤 그는 북만주 투먼(圖門)에서 목장일을 한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 강제징용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김교신도 그 대상이 될 위험을 느꼈다. 1944년 7월 현지징용의 형식으로, 흥남질소비료공장(노구치 재벌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세운 곳, 1927년 건설 당시 세계 2번째로 큰 공장, 이 공장은 비료와 함께 다이너마이트도 생산했다)에 자진취업했다. 이 공장은 일본질소비료공장 흥남연료공장으로 해군 비밀공장이었다. 그는 공장 노무과 조선인 주택 서본궁관리계의 계장을 맡았다. 이곳에는 수만 명의 직원이 있었고 조선인 노무자도 5000명 정도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의 조부가 이 공장에 다녔다. 또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이 흥남시청 비료계장으로 근무하면서, 흥남공장에 다니는 윤 감독 조부를 알고 지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을 돕다가 체포되어 9년간 옥살이를 한 일본인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8)는 1930년 흥남공장에 들어갔다. 이 사람은 조선인과 흥남좌익그룹에 참여해 흥남공장에 노조건설을 추진했다. 이소가야는 흥남공장의 내부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루종일 고막이 터질 듯이 쾅광대는 광삭분쇄기와 자욱한 분진, 용광로 속의 타고남은 찌꺼기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 그곳에서는 유산이 주르르 떨어지는 작업복을 입고 일곱 여덟 겹으로 접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은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가 주야 삼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류달영(1911~2004)]


김교신의 제자 류달영도 한때 이 공장에 있었다. 그는 당시 상황과 김교신의 활약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궤짝 같은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을 뿐으로 아무런 복지시설도 문화시설도 없는 곳이었지요. 이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일본과 그 밖의 위험지대로 징용당해 가는 청년들을 사방에서 불러모았습니다. 유치원과 학교, 병원을 세웠고 난방이나 식당을 갖춰 환경을 개선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경찰과 군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잘라냈습니다. 사방에서 성토를 했으나 군(軍) 직할공장이라 함부로 하지 못했지요. 김교신 선생은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땔감으로 쓸 석탄을 실은 카트를 밀고 끌었습니다. "(류달영 '한국의 미래상')

변소청소-석탄차 끌기 앞장선 김교신 계장

그가 가장 먼저 팔을 걷은 것은 공장위생 문제였다. 하수도와 변소 청소, 부엌과 침실 점검, 빨랫감 일광소독에 앞장섰다. 그리고 조선인 노무자에게 한글 교육을 시켰다. 당국에선 반대했지만, 조선인에겐 조선어로 교육시키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매일 출근 20분 전에 책상 앞에 나와 예배로 하루를 시작했다. 기도와 묵념, 그리스어로 성서를 읽는 것이 전부였다. 아침 조회 때는 성천강 둑을 함께 달렸고 둑에 걸터앉아 강의를 했다. 스스로 나서 변소청소를 하고 석탄차를 끄는 계장을 보고 근로자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들의 생활이 바뀌고 행동이 건실해졌다. 회사 전체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이 견학을 오기도 했다.

김교신은 이 공장의 활동이 조선인을 새롭게 하는 운동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함석헌과 류달영에게 몸만 가지고 공장으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또 김종흡, 박희병, 이창호도 합류토록 권했다. 그렇게 새로운 의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1945년 4월 8일 공장 서본궁 제6동에서 악성 발진티푸스 전염병이 발생했다. 김교신은 밤을 새며 근로자들의 방역과 간호를 했다. 그러다가 그가 이 전염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죽기 일주일 전인 4월 18일이 그의 생일이었는데, 생일상 앞에서 배가 아파 숟가락도 못 든 채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4월 25일 새벽 4시40분 죽음 앞에서 자신을 치료하던 조선인 의사 안상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언제 퇴원하여 공장을 갈 수 있습니까. 사십 평생에 처음으로 이 공장에서 민족을 체온으로 만나본 것 같소. 이 백성은 참 착하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이나 빵보다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안 의사, 나와 함께 일합시다. 추수할 때가 왔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꼭 갑시다."

이 말을 남기고 김교신은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전염병으로 사망한 터라 다음날 화장을 했다. 장례는 5월 1일 공장장(葬)으로 치렀다. 이 공장이 생긴 뒤 처음 있는 공식 장례였다. 이날 일본인 고다마(小玉) 과장이 앞으로 나와 이렇게 애도를 했다.

일본인이 "그의 인격에 감동했다" 추도사

"김 계장이 직장 계급으로는 아래였지만 인격에 감동하여 선생으로 모셔왔습니다. 단 하루를 만나지 않아도 그리워졌고 일을 너무 많이 하여 건강을 챙기라는 충고도 여러번 했는데 듣지 않고 일에만 전력하여 이렇게 서거하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을 잃었으니 슬픔에 한이 없습니다."

그의 유해는 함경남도 함주군 가평면 다래봉에 안장되었다. 석달 뒤 8월15일, 그토록 새로운 세상을 그리던 사람을 묻은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해방이 왔다. 그날이 온 뒤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 자신 먼저 염두에 떠오른 것이 '김교신이 있었으면"하는 생각이었고, 주위사람들의 첫인사도 "김 선생 생각나지요?"하는 말이었다. 김교신이라면 성서조선을 생각하고 성서조선이라면 문자 그대로 성서와 조선이다. 그는 일생을 이 잘못된 나라의 생명을 참으로 살려보고자 힘쓰고 애쓴 사람이다. 얽매인 겨레가 풀려놓이는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또 그것을 위해 힘썼던고. 그 마음 내가 알고 내 마음 그가 안다고 생각하는 처지에 기쁨 슬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자연의 정이면, 그날에 그의 생각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 간절한 생각이었다."

함석헌의 이 말 속에는, 조선계우회 사건 때 함석헌이 수감되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를 대신해 상주가 되어주던 김교신이 들어있을 것이고, 김교신 자녀들의 결혼식 주례를 도맡았던 자신의 기억이 다시 들어있을 것이다.

제자 류달영은 스승 김교신을 잃은 지 11년 뒤인 1956년 딸(류인숙)을 김교신의 장남과 결혼시켜 두 집안은 사돈이 된다. 류달영이 스승 타계 이후 계속 그 집안을 돌봐준 것이다.

김교신과 류달영, 두 사람의 사제 인연은 언제부터였을까. 김교신이 서울역 뒤의 양정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인 1927년 경기도 이천에 살던 류달영이 이 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양정고보는 조선의 엄비가 세운 학교라고 해서 엄씨학교로 불렸다. 이 학교에서 김교신은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류달영의 담임선생이었다. 김교신은 제자 류달영이 몹시 마음에 들어 "120점을 주면 딱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류달영은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교정하며 성경을 처음 접했고, 양정고보에서 기독교 신자가 됐다.
 

[다석 류영모 초상[그림=박상덕]]



"나도 죽어 쫓아가 다시 볼 수 있을지"

한편 김교신의 부음을 들은 류영모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1945년 4월25일 저녁 오류동에서 통지 오기를 '함흥에 있는 김교신이 별세, 전보 보고'라고. 류영모 본디 함석헌을 통해 김교신을 알았다. 제일 늦게 온 김교신이 오히려 제일 먼저 갔다. 류영모 비록 늦었으나 136개월 지난 즈음에 혹시 가까이 따라붙여 돌아가 서로 볼 수 있을지. 하느님께서 이렇게 생각하게 한다."

류영모가 11년 4개월(136개월) 뒤를 말한 까닭은 그 기간이 함석헌과의 나이 차이이기 때문인데, 세 사람의 운명이 어떤 고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교신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연결할 만큼 류영모에겐 그가 각별했다. 하지만 죽음은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1956년 8월 이후에도 그는 생을 계속 부여받았다.

# 다석 한시(漢詩) -  '창조시말(創造始末)'(1959 12.1)

衆生無他死刑囚(중생무타사형수)
終身有待執行日(종신유대집행일)
判決宣告虛誕日(판결선고허탄일)
猶豫期間壽夭日(유예기간수요일)

<인간창조 경위서>

뭇생명이란 다름 아닌 사형수라네
종신형 살면서 집행일을 기다리네
판결은 헛되이 태어날 때부터 선고됐고
유예기간은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날 차이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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