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사전출판사 콜린스는 올해의 단어로 '록다운(lockdown·봉쇄)'을 선정했고, <현대용어의 기초지식>이란 책을 37년째 펴내온 일본의 한 출판사는 ‘3밀(密)’을 올해의 유행어 대상에 선정했다고 한다. 둘 다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한 대책으로 제시된 것인데, 특히 ‘밀폐, 밀집, 밀접’을 의미하는 3개의 ‘밀(密)’은 지난 3월 일본 정부가 집단감염을 막기 위해 피해야 한다고 국민에게 호소하면서 제시했던 표어다.
국내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고 11개월이 지난 지금도 감염 확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우리 국민은 정부의 대응에 따라왔지만, 최근 병실이 부족해 집에서 기다리다가 사망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고 의료체계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일부 국가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지만, 우리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백신이 확보되지 못한 데다 접종 시기도 불투명해 ‘3밀’의 회피야말로 코로나19로부터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방책일지 모른다.
국민을 피로하게 하는 것은 코로나만이 아니다. 정부는 K-방역의 성과를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고 치적을 과시하지만,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감각과는 거리가 멀어 오히려 허탈하다. 오락가락하는 부동산 정책 때문에 집값, 전셋값이 폭등해 국민의 어깨는 처지고 한숨만 늘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벌이는 활극은 어느새 지지자 간의 세력다툼 양상을 띠어 검찰개혁 본연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강제징용문제는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정부가 삼권분립과 피해자 중심주의를 방패로 일본 측의 책임을 추궁하는 사이에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최대현안이 돼버렸다. 지난 9월 스가 총리 취임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대화를 통한 해결 의사를 표명한 이후 국정원장과 청와대 비서관이 공식·비공식의 일본 방문을 통해 접점을 찾아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청와대는 강창일 전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주일 대사로 내정하고 발표했지만 아그레망 없는 상태의 발표는 외교관례에 어긋나며, 2011년 5월 국회의원 신분이던 강 내정자가 일본과 러시아의 영토분쟁 지역인 쿠릴열도를 방문했던 것에 대해 일본 측이 반발하면서 난기류가 형성돼 있다.
관련기사
문재인 대통령의 거듭된 구애에도 스가 총리가 한국에서 개최할 예정의 한·중·일 정상회담 참석 의사를 밝히지 않아 연내 개최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내년 1월 출범할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정권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한국과의 긴밀한 협의를 바탕으로 유연한 대북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지만, 북·미 관계는 미국의 국제적 지위 회복과 분열된 미국 사회의 통합을 우선하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정책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
지난 11월 15일 아세안 10개국에 한·중·일, 호주, 뉴질랜드 등 15개국이 참가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타결된 뒤 같은 달 23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의사를 표명했다. CPTPP는 중국 포위를 목적으로 미·일이 주도해 서명했던 TPP에서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이탈을 표명한 이후 일본이 주도해 나머지 11개국이 서명하고 2018년 12월 발효되었다.
TPP나 CPTPP 가입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정부는 12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의 무역의 날 기념식 축사를 통해 RCEP보다 높은 수준의 무역과 투자 자유화, 전자상거래 규칙을 담은 CPTPP 가입 검토 의사를 처음으로 표명했다. 한국이나 중국의 가입을 위해서는 CPTPP 모든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가입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중국의 가입 의사 표명 직후 서둘러 한국이 가입 의사를 표명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더구나 중국은 자유무역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이 중국에 대해, 일본이 한국에 대해 취했던 것과 유사하게 국가안전에 관한 전략물자나 기술의 수출을 규제하는 수출규제법을 12월 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국가안전에 관한 핵심기술의 유출 방지가 표면적인 이유지만, 자유무역을 강조해온 중국의 기존 방침에 반할 뿐만 아니라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가 포함된다면 우리 기업에도 커다란 타격을 줄 우려조차 있다.
일본 정부는 인류가 코로나19를 극복한 증거로서 도쿄올림픽을 개최하고자 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평화의 제전(祭典)인 도쿄올림픽을 한·일 및 북·일 관계 개선의 계기로 활용해 남북·미·일 4개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려는 구상도 한국 정부에서 검토되고 있는 것 같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일본 방문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적으며,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도쿄올림픽 개최조차 불투명하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의 극복과 침체한 경제회복이란 난제에 직면해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중산층 재건을 위한 경제안보가 곧 국가안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일본도 지난 4월 경제안보 관점에서 경제와 기술, 사이버와 감염증 문제 등을 담당할 경제반을 국가안전보장국에 신설하고 조직을 확대할 예정이다. 중국은 10월 말에 끝난 당 중앙위원회 제19기 제5차 전체회의에서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GDP)과 1인당 국민소득을 현재의 두 배로 늘리겠다는 야심 찬 목표와 함께 ‘과학기술 강국’ 건설을 표방했다.
2021년의 한국은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릴 우려가 있다. 4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면 여야는 곧바로 2022년 3월 예정인 대통령 선거 체제에 돌입할 것이다. 국익이나 합리성, 실현가능성보다 당파성이나 감정에 편승하는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내년 1월 김정은 체제 2기의 출발점이 될 제8차 당 대회에서 어떤 대내외 정책이 제시될지도 중요하며, 내년 이후 동아시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미·중과 중·일 관계는 협력보다 갈등과 대립의 색채가 강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1세기의 한국은 힘없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20세기 초의 변방 약소국이 아니다. 경제 규모나 국방력에서 세계 10위 내외의 중견 국가로서 이제 한반도라는 우물에서 나와 국제평화와 번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구상하고 제시해야 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요인, 특히 동맹국 미국과 경제의존도가 높은 중국 사이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외교력이야말로 한국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면서 생존을 담보하는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