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강국 튀르키예는 지난 5월 28일 대선 결선투표를 통해 현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다시 선택했다. 튀르키예 국내 상황에서는 고물가와 연간 85% 넘는 인플레이션, 10% 넘는 실업률, 20년 장기 집권이 불러온 특정 세력의 경제적 권력 독점, 매너리즘에 빠진 관료주의, 언론과 학문 자유의 위축, 삼권분립의 위기 등에 설상가상으로 금년 2월 6일 대지진 재앙 등으로 에르도안 정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높은 형국이었다. 5월 14일 1차 경선 결과 어느 후보도 과반 확보에 실패하고 결선 투표에 돌입하자 긴박한 선거 상황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곧 바로 튀르키예로 달려갔다.
여론조사에서는 야당 후보가 내내 앞선 상황이었고 일부만이 막판 박빙을 예측해 왔다. 예상대로 1차 투표에서 어느 후보도 과반 득표에 실패하였고, 2차 결선투표에서 52.18% 지지를 얻은 에르도안 후보가 47.82%를 득표한 공화인민당 후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를 4.4%, 약 233만표 차이로 따돌리고 무난하게 승리했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강한 민심에도 야당 연합은 개혁 이미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생 야당 총재로 달콤한 권력을 향유해 온 75세의 노회한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를 선택한 것이 패착이었다. 그는 유세 기간 내내 새로운 비전 제시나 미래지향적 국가 발전의 청사진보다는 에르도안 정부의 실책과 정권 교체만을 목 놓아 외쳤다. 반에르도안 극성 지지층을 묶어두는 것을 넘어 젊은 세대나 변화를 바라는 다수 중도층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같은 날 87개 선거구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선출하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집권당 정의발전당이 600석 중 268석을 얻었고, 보수정당 국민행동당(MHP) 의석을 합쳐 집권 연합이 323석을 확보해 안정적 정국 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경제 기조의 정상화와 화해·포용의 국정 운영 기대
물론 재집권에는 성공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타격 또한 작지 않았다.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3대 도시를 모두 야당에 내주었고, 쿠르드계 주민들이나 대지진 참사 피해 지역의 민심이 상당 부분 돌아섰다. 따라서 에르도안 신정부의 최우선 정책은 민생 경제 지원과 경제위기 극복에 둘 전망이다. 민생 고통으로 연결되는 높은 인플레이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투자 감소와 곡물값 상승, 관광객 급감은 힘든 튀르키예 경제를 더욱 멍들게 했다. 러시아 의존 경제의 후유증으로 지난 5년간 달러 대비 터키 리라화 가치는 80% 이상 하락했고 대선 직후 3주 사이에도 25% 가까이 하락했다. 4월 공식 기준으로 인플레이션은 44%로 다소 진정되었지만 OECD는 2024년 인플레이션 전망치를 여전히 40.8%로 예측하고 있다. 경기 부양과 경제 위기 돌파를 위해 신정부 재무장관에는 경제 원칙론자이자 이미 재무장관과 경제담당 부총리를 역임했던 메흐메트 심셰크를 임명했고, 중앙은행 총재에는 하피즈 가예 에르칸이라는 44세의 젊은 여성 국제 금융가를 전격적으로 발탁했다.
2028년까지 25년 장기집권의 탄탄한 길을 열어 준 튀르키예 대선 결과는 미국의 탈중동 정책, 장기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전격 화해, 시리아 내전 종식 임박, 산유국들의 탈석유 미래 비전 프로그램들이 본격 가동되는 상황에서 중동 전체는 물론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남한 면적에 버금가는 8만여 ㎢ 지역에 대한 피해 복구가 시급하다. UNDP 조사 결과 약 10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130조원가량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금 조달을 위해 유럽연합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물론 이웃 산유국들과 관계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다. 현재 튀르키예와 유럽연합 간 가장 중요한 현안은 스웨덴의 나토 가입 승인 문제다. 튀르키예가 테러 조직으로 간주하고 있는 반체제 쿠르드 노동당(PKK)에 대한 스웨덴 정부의 미온적인 조치를 빌미로 회원국 튀르키예가 어깃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튀르키예 신정부가 상당한 유연성을 보이면서 7월에 리투아니아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담 이전에 전격적인 타결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내의 PKK, 시리아의 YPG 등 쿠르드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
일시적인 약속과 봉합이 이루어지더라도 쿠르드 문제는 앞으로도 튀르키예와 유럽연합 관계를 끊임없이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00년 이상 오스만 제국의 식민 지배를 직접 경험하면서 튀르키예의 부상을 가장 큰 위협으로 느껴온 유럽 사회는 기회 있을 때마다 쿠르드 이슈를 튀르키예 내부 혼란과 분열을 획책하는 유효한 전략 카드로 사용해 왔다. 자국 내 1500만명이 넘는 쿠르드인들이 자치 독립을 요구하고, 유럽 내 수백만 명의 쿠르드인들이 연대 투쟁의 강도를 높여나간다면 튀르키예 정부로서는 뾰족한 대안이 없고 쿠르드인 박해는 곧 바로 유럽과의 관계 파탄을 가져올 개연성이 매우 크다.
대미 관계는 훨씬 복합적이다. 2015년 튀르키예에서 발생한 쿠데타 배후세력의 지도자로 지목한 미국에 망명 중인 펫훌라흐 귈렌 송환 문제로 양국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이후 친러시아 외교정책을 이어가던 에르도안 정부가 전격적으로 러시아 방공 시스템인 S-400 미사일을 도입하여 실전 배치하고, 이에 대한 응징으로 미국은 오랫동안 공동 개발에 참여해 오던 최신예 전투기 F-35 공급 프로그램 계획을 백지화하면서 양국 관계는 100년래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 재선 이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가장 먼저 축하 전화를 보내고,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최측근 정보부장인 하칸 피단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대미 관계 개선에도 청신호가 켜지고 있다. 대미 관계 개선은 또 다른 걸림돌로 꼽히는 시리아 내 쿠르드 민병대인 YPG 문제에 대한 타결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그동안 YPG는 미국과 협조하면서 IS 괴멸에 앞장서 왔고, 사실상 시리아 내 미국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자국 내 PKK와 연계 문제를 비롯한 안보 위협 세력으로 간주해서 강력한 소탕 작전을 계속해 왔다.
YPG 제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튀르키예는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정부와 긍정적인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이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가 시리아와 외교관계 복원, 아랍 정상회의 복귀, 시리아 지원 방향 등을 논의하고 튀르키예와 시리아 내전 해결에 공동 보조를 맞춰왔던 친시리아 성향인 러시아와 이란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도 '에르도안-아사드' 관계의 재정립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시리아 내전이 안정되면서 튀르기예 내 약 400만명의 난민 중 이미 50만명에 가까운 시리아인들이 북쪽 국경을 통해 고향으로 귀환했고, 이미 튀르키예 국적을 취득한 수만 명의 시리아 난민 출신들이 이번 선거에 참여했다. 향후 100만명 정도의 시리아인들이 추가로 튀르키예 국적을 취득할 전망이다. 시리아 난민 처리 문제가 첨예한 국내 정치 이슈로 등장했고, 경제적 부담이 큰 시리아 난민 수용과 귀환 문제 타결을 위해서도 튀르키예와 시리아 간 새로운 협력이 필요해 보인다.
유럽(미국)-러시아-중동 사이의 균형 외교 복원
이웃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도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그동안 중동 국가들 간 대결구도의 한 축으로 튀르키예는 카타르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과 경쟁하고 이집트, 이스라엘과도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 왔다. 자말 카슈끄지 사우디 언론인이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사건 배후로 사우디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의 책임 여부를 두고 악화된 양국 관계는 최근 다시 화해와 복원의 길을 걷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이집트 민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가 이집트 군부 쿠데타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의 정당 주체인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이집트 군사정권과 날을 세웠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선을 계기로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의 축하 전화를 받았고, 양국 정상 간 상호 초청으로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개선보다는 현상 유지 상태다. 중국 내 최대 튀르크계 소수민족인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한 인식 조율과 튀르키예 정부의 태도가 가장 큰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마저 중국 당국에 의한 위구르 소수민족 인권 탄압을 용인하는 추세고, 주변 아랍 국가들도 하나씩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튀르키예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셰일 가스 상용화로 이미 세계 최대의 에너지 패권국인 미국이 더 이상 중동의 원유를 도입하지 않고, 대신 일산 175만배럴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을 중국이 수입하는 상황에서 아랍 산유국들이 중국의 입장에 반기를 들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지구상에서 한국을 가장 좋아하며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는 튀르키예와 한국의 관계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어갈 전망이다. 우선 에르도안 대통령이 한국과 우선 협력할 것을 강조해 왔고 전통적인 경제협력과 문화 교류를 넘어 한국이 6·25전쟁 이후 이룩한 과학기술 입국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어 과학기술 협력과 교류, 방위산업 수출 확대와 기술 이전, 과학 기술 인재 양성을 위한 카이스트 같은 첨단 기술 교육 기관 설립, 한국형 원전 사업 참여 요청 같은 협력 분야가 기대된다.
필자 주요 이력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국내외 저서 90여 권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