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은 박정민을 "영리하고 지혜로운 배우"라고 소개했다. 류 감독의 말대로 박정민은 작품과 캐릭터의 핵심을 꿰뚫고 영리하게 돌파해 나가는 배우다. 언제, 어디서나 제 몫을 해내고 캐릭터나 장르적으로도 스펙트럼을 확장해 '보는 맛'이 있다.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 잡은 박정민. 언제나 '다음 작품'을 기다려지게 만든다.
올여름 극장가, 유일하게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며 흥행 중인 영화 '밀수'(감독 류승완)는 또 한 번 박정민의 진가를 느끼게 된 작품이다. '베를린' '베테랑'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특유의 리듬감을 살려 '밀수'를 채워나갔고, 박정민은 류 감독의 리듬감을 생생히 살리며 영화를 다채롭게 만들었다.
"류승완 감독님의 오랜 팬이에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입덕'했거든요. 영화의 꿈을 가지게 된 작품이기도 하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시작해서 이후 작품들도 찾아보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 작품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네요. '밀수'는 감독님 작품 중에서도 새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 하고 싶었어요."
극 중 박정민은 '밀수'의 핵심 키를 쥐고 있는 '장도리' 역을 맡았다. '춘자'(김혜수 분)와 '진숙'(염정아 분) 아래서 잡일을 도맡던 막내 '장도리'는 일련의 사고로 '밀수팀'이 해체하자 "인생을 바꿔보겠다"는 야망을 품는 캐릭터다. 파격적인 외모와 시대의 무드를 담은 인물로 영화 팬들에게 큰 반응을 끌어냈다.
"'장도리'를 연기하면서 '소형견' 같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작은 개들이 무서우면 더 짖잖아요. 계속해서 으르렁거리고 언제든 물 준비를 하는 식으로요. 길들지 않은 작은 개라고 생각한 거죠. 시작부터 소형견이라고 여기고 접근한 건 아니었고요. 하다 보니까 점점 (소형견의 특징에) 맞춰지게 되었어요."
박정민은 '장도리' 역할을 두고 류승완 감독의 특징을 녹여냈다고 말한 바 있다. "특유의 말맛"을 특징적으로 강조했다는 설명이었다.
"감독님만의 뉘앙스가 있어요. 충청도 뉘앙스라고 할까요? 특유의 '말맛'이 있거든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어떤 의미들이 담겨있어요. 현장에서도 이야기했던 게 감독님께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캐릭터가 '장도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디렉션이 더 구체적이었어요. 감독님은 '내가 잘 아는 인물이니까 너에게 이렇게 주문하는 거다'라고 하셨죠."
박정민은 류승완 감독의 '뉘앙스'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고향이 충청도이기에 류 감독만의 박자나 뉘앙스가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다행히 부모님께서 충청도 분이어서 어릴 때부터 그런 뉘앙스가 익숙했어요. 감독님이 즉흥적으로 대사들을 수정해 주셨는데 대사의 톤이나 사투리 같은 걸 바로바로 캐치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옥분'(고민시 분)과 '권상사'(조인성 분)를 험담하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옥분'이 '권상사 못 이겨?'하고 부추기면 발끈해서 '맨손으로도 두드려 팰 수 있다'면서 '옥분'에게 핀잔하죠. '오징어나 가지고 와' 같은 대사들은 거의 즉흥적인 건데 감독님의 뜻대로 그때그때 익혀서 연기했어요."
박정민은 류승완 감독의 디렉션에 따라 그때그때 장면들을 수정해 나갔다. "미리 준비해 간 연기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대체로 미리 준비해 간 것보다 감독님이 즉흥적으로 주는 디렉션이 더욱 좋았다"고 답했다.
"미리 준비한 건 (감독님께) 보여드리기도 하고, 리허설 중에 맞춰보기도 했어요. 감독님이 그걸 보고 '여기에 이런 걸 더해보면 좋겠다'고 주문하시는 편이었죠. 역할에 대한 해석이 달라서 괴리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때그때 (류승완 감독이 주는 아이디어를) 받아먹어야 해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을 뿐이죠."
류 감독의 디렉션과 박정민의 섬세한 터치는 '장도리'라는 인물을 매우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극 중 강력한 악인이지만 동시에 코미디를 아우르는 독특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저는 '웃긴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접근하지는 않았어요. 상황에서 오는 감정의 폭을 어떻게 해야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했죠. 캐릭터마다 어떤 변화를 해야 할지 태도에 대한 생각들을 했죠."
박정민의 필모그래피는 또래 배우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파수꾼'을 시작으로 '동주' '그것만이 내 세상' '사바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에 이르기까지. 감독들은 박정민을 다채롭게 썼다. 박정민의 쓰임새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났고 관객들에게,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기곤 했다.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편이라서요. 하하하. 그래서 다양한 장르,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활동한 기간에 비해 '박정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잖아요. 그게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해요."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는 감독들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다채로움을 가지고 있다. "특정 이미지를 가지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도 있느냐"고 물으니, "관객에게 인식되는데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특정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관객들에게 선명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제가 조금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도 여러 감독님과 다양한 장르, 캐릭터로 일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점 같아요. 세월에 맡겨보려고요."
특정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최근 박정민은 '짜증계의 신성'으로 불리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연기의 일인자라는 평을 얻고 있다. "이선균 배우 마저 '왕좌'를 넘겨주었다는 표현을 한다"고 말문을 떼니,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고 한다"며 웃었다.
"'짜증' 연기는 아예 생각 안 하려고 해요. 제가 잘한 부분을 관객분들께서 알아봐 주시고 칭찬해 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걸 의식하다 보면 연기의 폭이 좁아질 거 같아요. '짜증 연기'를 의식하면서 연기하지 않으려고요."
오랜 시간 박정민은 자신만의 '로직'을 구축해 연기해 왔다. 과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작품이나 캐릭터가 이해되지 않으면 연기하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던 바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일종의 핑계였던 거 같아요. 저의 경험은 미천하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죠. 당시에는 '내가 (시나리오를) 납득하지 못하면 연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도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감독님과 계속해서 이야기는 나누면서 (감독님이 그리는) 정답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시간이 지나다 보니 예전보다 유연해진 것 같고요. 카메라 앞에서 더욱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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