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의 삶이란 누구에게나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평생 달려왔지만 정해진 연령의 고비에서 일단 달려왔던 길을 멈추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화려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을 지나왔던 길과는 전연 다른 길을 찾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은퇴를 맞게 되면 누구나 고민하면서 남은 생애 자신의 삶을 보람차고 알차게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중에서도 대통령을 역임한 이들의 은퇴는 일반인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게 마련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선출된 대통령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다. 그러나 일단 퇴임하면 소시민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최고 권력자에서 소시민으로 돌아간 삶은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변화된 상황을 극복하여 성공적인 은퇴의 삶을 달성하기가 일반인보다 더 복잡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재선을 스스로 포기한 사례는 엄청난 용단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두 세기가 넘는 역사를 가진 미국의 대통령들은 퇴임 후 대부분 향리에서 조용히 지내는 삶을 보냈다.
그런데 46대에 이르는 대통령들 중에서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과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장수학자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미국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로 태어나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미국 최초 부자(父子) 대통령이다. 그러나 그는 1차 임기 후 대통령에 재선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평가가 높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특별한 이유는 대통령직을 마친 뒤 삶이 다른 대통령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재선에 실패한 그는 고향 퀸시에 돌아와 과거의 대통령이었다는 영화에 안주하지 않고 심기일전하여 지역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8번이나 연이어 당선되어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하였다. 중도에 주상원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하기도 하였으니 그의 인생 노정을 보면 주민 투표에 의한 선택을 받으면서 정신적 영욕이 얼마나 컸을까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후일 그가 특별하게 인정받게 된 이유는 당시 유명하였던 ‘라 아미스타드’호 노예반란사건 때문이었다. 카리브에서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적극 지지하여 무죄가 되게 하였고 이를 계기로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하여 후일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을 기초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인정받게 되었다. 그가 화려한 과거는 덮어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허심탄회하게 고향을 위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낸 행보는 은퇴 후 삶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존 퀸시 애덤스의 행보가 우리 피부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는 소멸되고 있는 우리나라 농어촌 지역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바쳐 국가 발전과 미래 사회를 위하여 불철주야 헌신해 왔던 유능한 은퇴자들이 이제는 귀향하여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라는 해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존 퀸시 애덤스에 못지않게 은퇴 후의 삶을 아름답게 누린 사례는 미국 제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이다. 지미 카터는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나 해군 복무 후 고향에서 땅콩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주상원의원, 주지사를 역임하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도덕주의와 평화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그는 이집트-이스라엘 캠프데이비드 평화조약을 조인하도록 유도하였고 소련과는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조인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치는 그의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나라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고 한미연합사를 창설하였다. 그의 치세 도중에 박정희 대통령 시해와 5·18 사태가 일어났으며 이를 야기한 신군부를 인정한 카터의 대통령으로서 행보는 논란을 야기하였고 결국 재선에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터가 특별한 이유는 퇴임한 후 민간 중심의 카터재단을 만들어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는 제3세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 선거감시체계를 구축하였고 질병 방재를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빈곤층을 지원하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추진하는 박애적 활동을 벌렸다. 뿐만 아니라 전임 미국 대통령으로서 후광과 인맥을 동원하여 국제적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핵분쟁 위협이 제기된 북한을 비롯하여 아이티, 팔레스타인, 보스니아 등 국제분쟁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그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강구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스라엘-이집트협정의 성과가 부진하자 다시 오슬로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협정을 중재하였다. 이러한 인권존중과 국제적 분쟁중재의 공로로 그는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대통령직을 은퇴하고 나서 세계 평화와 빈민 퇴치를 위하여 헌신한 그의 노력이 인정받게 되었다. 부인 로잘린 여사와는 1946년 결혼하여 2023년 사별하였으니 77년을 해로하였다. 하지만 2015년 악성흑색종의 진단을 받고 치료받아왔으나 전이가 진행되어 2023년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간병을 받고 있다. 그는 10월 1일이 되면 백세인이 된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백세인이 되는 것이다. 그의 행보에 대해 장수학자가 특별하게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1981년 대통령직을 벗어난 이래 43년 동안 대통령 시절보다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사회봉사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굴레 속에서 완성할 수 없었던 도덕주의와 평화 유지라는 철학을 전파하기 위해 자유인의 신분으로 국내외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행적은 은퇴 후의 삶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직에 연연하지 않고 퇴임 후에도 자신의 꿈과 희망을 견지하며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은 이들의 삶은 퇴직하고 나서도 오랜 기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은퇴자들에게 삶의 방향을 이끌어 줄 등불이 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퇴직 후의 공허함과 무력감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여 지속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면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노년의 삶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은퇴 후에도 목적을 잊지 않고 지역사회에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미래 장수사회의 희망이자 해법이 아닐 수 없다.
필자 박상철 주요 이력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 ▷국제백신연구소한국후원회 회장 ▷전남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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