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욕의 고장 울진, 대한민국의 숨으로
삼욕(삼림욕·해수욕·온천욕)의 고장 울진은 이제 '대한민국의 숨'으로 불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고장이란 뜻이다.
실제로 환경부는 몇 해 전 울진을 '전국에서 연평균 초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낮은 도시'로 선정했다. 2022년 제13회 공기의 날에는 맑은 공기 모범도시에 이름을 올렸다.
자연의 특혜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장, 울진에 발을 내딛자 시원한 가을바람, 그 바람에 실려온 바다 내음이 들숨을 타고 들어와 폐부 깊은 곳에 닿는다. 초겨울을 향해 가는 바람이니 온기를 품은 것도 아닐 텐데, 일상의 고단함이 삽시간에 녹아 사라지는 듯 따스하기만 하다.
울진죽변해안스카이레일은 죽변항부터 후정 해수욕장까지 운행하는 왕복 4.8㎞의 관광 모노레일로, 2021년 여름 첫선을 보였다. 코로나19 기간에도 외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며 죽변의 명소로 거듭났다.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과 '하트해변(곡선 해안 중간 갯바위가 수면 위로 튀어나온 모양이 하트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달린다. 사실 시속 5㎞로 조금 빨리 걷는 수준이라 이 해변 풍광을 오롯이 담을 수 있다. 청람색 바다의 속살을 오롯이 보여주는 하트해변과 주황색 지붕의 세트장을 감상한 후 승강장에 내려 해안절벽을 따라 숲 사잇길 '용의 꿈길'을 천천히 걷는다.
용의 꿈길은 해안 암초 사이에서 용이 승천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어디에 있는지 찾진 못했지만 아름다운 풍광이 벗이 되어 주는 것에 만족하련다.
걷다가 죽변등대와 공원에 들러 잠시 쉬어간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죽변등대는 100년 넘는 세월 동안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 등대 맞은편에는 죽변리와 독도 사이 거리(216.8㎞)가 가장 가깝다는 것을 표시한 독도 최단 거리 표지석도 있다.
덕구계곡 따라 걷고 온천욕 즐기며 시름 녹이다
이제 덕구계곡으로 간다.
겨울을 코앞에 뒀는데 웬 계곡 타령이냐고 묻지는 마시라. 해발 1000m가량인 응봉산을 품은 덕구계곡은 사계절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특히 덕구온천에서 계곡을 따라 원탕까지 향하는 4㎞에 이르는 오솔길은 금강산 구룡폭포 가는 길을 축소해 놓았다고 할 정도로 절경이다.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와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벗 삼아 천천히 걷는다. 금문교, 서강대교, 노르망디교, 하버교, 청운교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량 12개 축소판을 감상하는 재미는 언제나 쏠쏠하다.
이 다리를 하나씩 지나면서 형제폭포, 옥류대, 용소폭포 등 절경을 감상하다 보니 덕구온천 원탕과 마주한다. 여행자들을 위한 명품 쉼터로 입소문이 난 원탕 아래에 설치된 족탕에서 발을 담그고 잠시 쉬어간다.
덕구계곡 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와 덕구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기기로 한다. "온천은 온몸으로 먹는 보약"이라며 머뭇거리는 지인을 온천장으로 이끈다.
덕구온천은 국내 유일한 자연 용출 온천이다. 2009년 ‘국민 보양온천’으로 지정되기도 한 덕구온천 온천수는 피부병·신경통 등 질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온천장을 마지막으로 찾았던 때가 코로나19 확산 이전이니 못해도 5년은 족히 넘은 듯하다. 오랜만에 찾은 온천장이 마치 처음 온 듯 생경하다. 거의 모든 시설과 서비스가 '무인화'돼 있어 신발은 어떻게 넣어야 할지, 세신에 필요한 물품은 어디에서 구입해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온천장에 들어가 온천욕을 즐긴다. 모든 것이 낯설어도 덕구온천 물은 여전히 좋다.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앉으니 트레킹 후 몰려온 피로가 스르르 녹는 듯하다.
늦가을 낭만이 스민 노천탕으로 향한다. 코끝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지,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보부상의 애환 스민 금강소나무숲길을 걷다
아침이 밝았다. 숙소를 빠져나와 뜨끈한 곰치국 한 그릇 들이켠다. 그리고 곧장 금강소나무숲길로 향한다.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은 조선시대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십이령 옛길과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어우러진 길이다. 산림청이 국비를 들여 조성한 1호 국가숲길로, 2010년 7월 1구간 '보부상길'이 열렸다. 1구간은 총 13.5㎞다. 모두 걷는 데 6시간가량 걸리는, 난이도 '상' 코스다.
코스 전체를 걸을 요량은 아니다. 금강소나무 숲길 1구간 시발점에 몇 해 전 조성됐다는 십이령 보부상 주막촌만 잠시 보고 오기로 한다.
과거 십이령길은 험준했다. 울진장과 죽변장 등에서 구입한 미역과 간고등어, 소금 등을 짊어지고 내륙인 봉화 소천장에 가려면 어디서 오든 반드시 두천리에 하루 묵을 수밖에 없었다. 주막이 번성한 이유다.
특히 1960년대까지 소 장수들이 드나들어 주막이 번성했다. 조선시대 보부상과 뒤이은 선질꾼 등 수많은 행상이 동해와 내륙의 물산을 나르던 '동해의 차마고도' 였다.
주막은 다사다난했다. 다양한 이들의 서로 다른 애환이 뒤섞여 든 공간이었을 게다. 밤새 술을 마시며 애환을 달래기도 하고, 집에 있을 가족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사람도 허다했을 것이다. 투전을 하다 돈도 물건도 탕진해 장에 나갈 수 없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빛바랜 역사로 남은 보부상들 이야기는 이곳 십이령 보부상 주막촌에 스며들었다. 현재 주막촌에는 넓은 주차장과 초가집, 보부상 조형물이 조성돼 있다. 봇짐을 지고 스마트폰을 하는 보부상부터 스마트워치를 찬 보부상까지 그 자태가 퍽 익살스럽다.
주막촌 가까이에 자리한 계곡물 건너에는 1890년경 보부상과 선질꾼들이 그들의 안전한 상행위를 도와준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는 비석 두 개(내성행상불망비)가 자리하고 있다. 자세히는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와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다. 이 비는 고종 27년(1890)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6월 30일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됐다.
1박 2일 여정은 끝이 났다. 고단했던 그간의 삶이 조금은 윤택해진 듯하다. 며칠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돌아갈 채비를 한다. 삶의 고단함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테니, 여행의 추억을 안고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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