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성사 및 무역합의 진전을 위해 중국에 대한 기술 수출 통제를 사실상 동결한 것으로 나타났다.
28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이 최근 수개월간 중국을 겨냥한 강경 조치를 자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미·중 양국은 이날부터 이틀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세 번째 고위급 무역협상을 가질 예정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행정부의 고성능 반도체 수출 제한 조치에 이어 중국 시장을 겨냥해 설계된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칩인 H20 수출을 차단할 방침을 밝혔으나, 지난 15일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이 CNBC 인터뷰에서 수출 허용 방침을 공식화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에 따라 현재 H20 칩은 미국 안보 당국과 엔비디아 간 갈등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안보 전문가들은 H20이 중국군의 AI 기반 군사력 증강에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엔비디아 측은 미국의 수출 통제가 오히려 중국의 기술 자립을 앞당길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날 FT는 매트 포팅거 전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비롯한 전·현직 안보 전문가 20명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에게 H20 수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서한에는 "이번 조치는 미국의 AI 분야 경제적·군사적 우위를 위협하는 전략적 실책"이라며 "H20은 중국의 최첨단 AI 능력을 강력하게 가속할 수 있는 제품"라는 지적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H20이 추론(inference) 성능 면에서 미국이 수출을 금지한 H100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평가도 담겼다.
이에 대해 엔비디아는 서한에 담긴 비판이 오해에 기반한 것이며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발표한 AI 기술 수출 확대 정책과도 모순된다고 반박했다. 이어 "H20은 어떠한 군사 능력도 강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미국이 세계 개발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반대 여론은 여전하다. 지미 구드리치 미국 랜드연구소 기술자문위원은 "H20은 중국 AI 엔진에 연료를 공급하는 휘발유"라며 H20은 중국산 칩 중 최고 수준의 메모리 대역폭을 보유하고 있어 대규모 AI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H20를 둘러싼 갈등에 넘어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협상 진전을 이유로 수출 통제 등 대중국 강경 조치를 미루고 있는 데 대해 안보 전문가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백악관 수석 전략가를 지낸 스티브 배넌은 FT에 "H20 칩을 중국에 판매하도록 허용한 것은 엄청난 실수"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 기업들은 수십 년간 중국 공산당에 기술을 도둑맞고도 아무 대가도 받지 못했다"며 "믿기 어렵게도 정부는 국가 안보에는 전혀 관심 없이 오직 이익만을 좇는 기업들의 요구에 따라 이 굴욕적인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FT는 지난 5월 미 상무부가 중국 반도체 기업 자회사를 수출 블랙리스트(entity list)에 올릴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FT는 이를 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향후 중국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할지, 아니면 무역 협상을 위해 유화적 접근을 유지할 지를 가늠할 시험대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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