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톱스타를 만든 작품들을 톺아보고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이건희의 명성'은 스타들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명장면과 명대사를 통해 그들이 걸어온 연예계 생활을 돌아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연예계 큰 별이 졌다. 언제나 작품의 완성도를 먼저 생각했던 '대배우' 고(故) 안성기가 9일 영면에 들었다.
안성기는 지난 5일 오전 9시께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2019년부터 혈액암 투병을 이어오던 고인은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음식물이 목에 걸린 채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뒤 의식불명 상태로 치료를 받아오다 입원 6일 만에 사망했다. 안성기의 장례식은 서울성모병원에서 영화인장으로 5일 동안 치러진 뒤 이날 발인식을 마쳤다.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진행됐으며 영화인 영결식도 엄수됐다. 여러 연예계 동료들과 지인들은 그와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정부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많은 배우들의 귀감이 된 '한국 영화계의 거목' 안성기의 헌신을 인정한 셈이다.
'배드캅 굿캅'
안성기하면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작품은 바로 1993년 개봉한 영화 '투캅스'다. 안성기는 투캅스를 통해 배우 박중훈과 함께 환상의 호흡을 선보이며 대중을 홀렸다. 일명 '배드캅 굿캅' 형사 듀오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다.
안성기는 현실에 타협한 '배드캅' 조윤수 역을 맡아 능청스러운 연기를 선보여 쉽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상대역인 박중훈이 연기한 '굿캅' 강민호의 정의감과 비교돼 더욱 존재감이 또렷해졌다. 두 사람이 갈등을 딛고 진정한 동료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이를 통해 안성기와 박중훈 콤비는 한국 영화계 최고의 '브로맨스 콤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투캅스'로 1994년 제32회 대종상에서 공동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고, 2006년 개봉한 영화 '라디오스타'에서도 다시 한 번 '브로맨스'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야말로 '영혼의 파트너'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호흡이었다.
"날 쏘고 가라"
안성기는 명대사가 많은 배우는 아니다. 대신 묵직한 연기로 오래 기억될 장면을 남기는 배우다.
그런 그에게도 영원히 회자되는 명대사가 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이다. 1108만1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사상 첫 '천만 영화' 시대를 연 실미도 속 안성기의 존재감은 더욱 선명했다.
북파 계획이 취소돼 사살당할 위기에 처한 684부대 대원들이 탈영을 시도하며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재현 준위로 분한 안성기는 "날 쏘고 가라. 아니면 내가 널 죽일 수밖에 없다"는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당시 상황과 안성기 특유의 중저음이 합쳐져 명장면이 탄생했다. 그 장면에서 강인찬 역의 설경구가 소화한 또 하나의 명대사 "비겁한 변명입니다"가 돋보일 수 있던 것도 안성기가 "그래. 비겁하고 무능한 대장이지"라고 받아친 안정적인 연기 역시 한 몫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마시고 싶습니다"
안성기는 작품뿐 아니라 광고를 통해서도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배우다. 특히 커피 브랜드 맥심과 인연이 깊다. 1983년부터 2021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동행하며 맥심 광고 모델로서 활동했다.
안성기는 "커피를 알게 될수록 깊은 맛이 좋아집니다", "커피, 이제는 향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마시고 싶습니다" 등의 대사를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전달했다. 이에 맥심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들었다.
동서식품은 안성기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면서 "안성기는 커피 한 잔이 전하는 일상의 여유와 따뜻함을 소비자에게 전달해주셨다"고 추모했다. 그러면서 "함께해 주셨던 시간에 감사드리며, 고인의 뜻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안성기는 '라디오스타'를 통해 박중훈과 작품에서 또 만났다. 그는 '왕년의 가수왕' 최곤(박중훈 분)을 다시 스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매니저 박민수를 연기했다. 박민수는 안성기가 직접 가장 애착을 가진 역할로 꼽았던 배역이다.
라디오스타 엔딩 장면에서 안성기가 환한 미소로 신중현의 곡 '미인' 속 가사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부르며 박중훈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은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더욱이 자신은 비를 맞은 채 스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이 진한 여운을 남겼다. 이후 박중훈에 의해 해당 컷이 안성기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안성기도 "운명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박중훈이 안성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울먹이며 "민수형 돌아와야지. 지금 장난치는 거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 없다고, 와서 좀 비춰주라"고 외치는 장면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이 장면에서 안성기의 담담한 표정 연기는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수많은 명장면이 탄생한 라디오스타로 안성기와 박중훈은 2006년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다. 투캅스에 이어 또 한 번 권위있는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받아 '브로맨스'를 제대로 각인시켰다.
박중훈은 안성기의 혈액암 투병 소식이 전해진 뒤 투캅스와 라디오스타를 한 편씩 더 찍고 싶다는 소망을 내보였지만, 실현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라디오스타는 안성기의 별세 소식과 함께 더욱 관심을 받고 있다. 어쩌면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가사와 "돌아와야지"라는 대사가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대중이 아직 '국민 배우' 안성기를 완전히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성기는 오랜 연기자 생활 속 본인이 주목받기보다는 늘 작품을 먼저 생각하고, 맡은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라는 라디오스타에 담긴 명대사를 일생 동안 실천한 배우가 바로 안성기였다. 그렇기에 동료들은 대스타임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연예계 활동을 오래도록 지속한 안성기를 더욱 그리워하고 있다.
힘든 암 투병을 겪으면서도 현장 복귀 의지가 강했던 안성기. 이제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연기를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장면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생전 "영화란 나의 꿈, 나의 행복, 삶 그 자체"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그곳에선 아픔 없이 하고 싶은 연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안성기 필모그래피
△데뷔-1957년 영화 '황혼열차'
△주요 출연작
1960년 영화 '하녀'
1980년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
1981년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1년 영화 '철인들'
1983년 영화 '안개마을'
1984년 영화 '고래사냥'
1985년 영화 '깊고 푸른 밤'
1987년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1992년 영화 '하얀전쟁'
1993년 영화 '투캅스'
1994년 영화 '태백산맥'
1995년 영화 '영원한 제국'
1999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3년 영화 '실미도'
2006년 영화 '라디오스타'
2007년 영화 '화려한 휴가'
2012년 영화 '부러진 화살'
2019년 영화 '사자'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
2023년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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