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왕과 사는 남자, 국민과 사는 정부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2026년 4월 초,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누적 관객 수가 천오백만을 넘어섰다. 단종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단종앓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가슴이 아프고 시리고 아린 상태를 우리는 ‘앓는다’고 말한다. 단종을 향한 감정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머물며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감정이다. 우리들의 단종을 향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단순한 역사 속 패배자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억울하게 밀려난 정당성’의 상징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수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유독 단종만이 이처럼 감정의 중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관심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특정한 방식으로 정당성을 이해해 왔다는 증거이다. 단종 서사(敍事)의 핵심은 권력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정당성의 유예’이다. 정당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권력에서 밀려난 존재, 그리고 생전에는 회복되지 못하고 사후에야 비로소 복권되는 구조. 우리는 이 서사에서 패배를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언젠가는 바로잡혀야 할 상태’로 본다. 그래서 단종은 죽은 왕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으로 남는다. 단종 서사에서 더 중요한 인물은 따로 있다. 엄흥도이다. 그는 권력을 되찾은 인물이 아니다. 대신 끝까지 떠나지 않고, 버려진 정당성을 기억하고 지켜낸 사람이다.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충신이 아니라, ‘한을 보듬은 사람’이다. 단종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억울함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존재, 단종 서사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기억과 감당, 그리고 불감당(不堪當)의 이야기로 남는다.
 
이 지점에서 한국 문화가 흔히 말하는 ‘한(恨)’이 개입한다. 그러나 ‘한’은 단순한 슬픔이나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억울함과 상실, 분노와 기다림이 뒤엉켜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다. 그것은 폭발하지 않고 오래 머물며, 결국 사람을 버티게 만드는 힘이다. 이 감정의 구조는 우리 문학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하면서도 끝내 붙잡지 않는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 하면서도, 그 눈물은 밖으로 흐르지 않고 안으로 스며든다. 사랑하지만 붙잡지 않고, 원망하지만 소리치지 않는다. 감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삼켜버린다. 표현하지 않되 사라지지 않는 감정, 이것이 ‘한’의 본질이다. 그리고 단종 서사는 이러한 감정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역사적 장면이다.
 
이 감정은 단순한 문화적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무엇이 정당한가를 판단하는 집단적 감각으로 이어진다. ‘한’의 민족이기에 우리는 단종의 ‘한’을 더 깊이 기억하고, 더 강하게 공감한다. ‘단종앓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감정의 형식이다. 이 감정은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서도 반복된다. 관객 수, 천오백만명을 돌파하는 흥행은 단순한 서사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적 정서의 반응이다. 사람들은 극장을 찾는다.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며 함께 울고 웃는다. 그 과정에서 오래 쌓여 있던 감정을 서로 확인하고, 개인의 감정이 타인의 감정과 맞닿아 있음을 체감한다. 흩어져 있던 감정들이 하나의 정서로 모이는 순간이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의 정서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반복되어 왔다. 전쟁과 피난, 상실과 분열의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울부짖기보다 이를 악물고 버텼고, 감정을 밖으로 터뜨리기보다 안으로 축적했다. 그래서 ‘한’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기도 하다. 무너지지 않고 다음을 기다리는 힘, 그것이 ‘한’이다.
 
이 ‘한’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축적되다가 결국 방향을 바꾼다. 과거에는 참아내는 감정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바로잡고자 하는 감정으로 이동한다. 이 사회에 대한 ‘한’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시간 속에 쌓인 감정의 퇴적층이다. 기회의 불평등에서 시작된 ‘한’은 노력과 보상의 불일치로 이어지고, 그 불일치는 다시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축적된다. 여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겹치면서, 이 감정은 점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구조로 굳어진다. 결국 이 모든 ‘한’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이 사회는 과연 정당한가?, 이 질문은 대중문화 속에서도 되풀이된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억울하게 밀려난 정당성을 다시 확인하고,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동시성’이다. 같은 장면에서 동시에 울고, 같은 지점에서 동시에 숨을 고른다. 감정은 개인의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동일한 시간 속에서 공유된다. 이 공유된 감정은 하나의 집단적 경험으로 굳어지며, 단순한 관람을 넘어 하나의 감정적 사건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이러한 감정의 응집은 해소로 끝나지 않는다. 함께 경험된 감정은 방향을 요구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공감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요구로 전환한다. 감정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힘을 갖는다. 분산되어 있을 때는 개인의 체험에 불과했던 것이, 응집되는 순간 현실을 움직이는 에너지로 바뀐다. 그래서 어떤 감정은 잊히지 않고, 어떤 감정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적 움직임은 바로 이 축적과 응집의 결과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때로는 제도보다 시민이 먼저 움직인다. 잘못된 권력을 막기 위해 맨손으로 거리로 나서는 장면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즉흥적 분노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감정이 한 방향으로 정렬된 결과이다. 정당성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행동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최근 이 사회의 정당성이 잠시나마 흔들렸던 순간이 있었다. 누구나 그 위법의 장면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경험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정당성은 결국 회복된다는 집단적 감각을 현실 속에서 확인한 계기였다. 이러한 기억 위에서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은 단순한 감동의 확산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 결국 제자리를 찾는다는 확신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확신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온 보이지 않는 기반이다. 제도가 흔들릴 때 그것을 붙잡는 힘, 권력이 왜곡될 때 그것을 바로잡는 힘, 그리고 사회가 방향을 잃을 때 다시 기준을 세우는 힘은 법과 제도 이전의 집단적 감정에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은 도덕적 희망이 아니라 정치적 원리가 된다. 정당하지 않은 것은 결국 교정되어야 한다는 요구, 그리고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시민의 의지, 이 원리는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된다. 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사필귀정’은 민주공화국의 다른 이름이다.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권력은 결국 교정된다는 원리, 그것이 이 체제를 작동시키는 핵심이다. 단종을 향한 감정이 왕정을 향한 향수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작동시키는 감각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사회는 오래 앓아왔다. 중요한 것은 회복이다. 그 회복은 추상적 구호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삶의 변화로 증명되어야 한다. 이른바 ‘민생 체감’의 문제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기본소득 사회나 에너지 지원과 같은 정책 역시 단순한 복지의 확대가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경제적 한’을 덜어내고 삶을 정상의 궤도로 되돌리는 실질적 수단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것이 단지 제도의 이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안정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결국 국민은 이념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한다. 불안을 줄이고 삶을 회복시키는가, 그 결과만이 정치의 정당성을 결정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안정이며, 선언이 아니라 삶의 정상화이다. 쌓여온 감정을 풀어내고 누적된 피로를 덜어내는 것, 그것이 정치가 도달해야 할 지점이다. 그래서 정치의 역할은 여기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사회가 오래 앓아온 가슴앓이를 다루는 일이며, 축적된 ‘한’을 해소 가능한 상태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감정을 방치하면 분열로 이어지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풀어내면 회복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사필귀정’을 믿는다. 그것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이 사회가 결국은 바로잡힐 것이라는 집단적 확신이다. 정치가 이 확신에 응답할 때 비로소 오랫동안 누적된 가슴앓이도 가라앉기 시작한다. 우리는 여전히 단종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왕을 향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정당한 것이 제자리에 놓이는 사회, 그리고 그 질서가 실제 삶 속에서 회복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단종앓이’를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단순한 행정 권력이 아니라, 이 사회가 축적해 온 감정을 다루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전국 순회와 현장 중심의 회의 주재는 단순한 행정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삶에 축적된 ‘한’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그 감정을 현실에서 풀어내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다. 이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은 분명하다. ‘한’의 무게를 이해하는 감각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감정을 끝까지 붙들고 현실로 전환할 수 있는 책임의 의지, 다시 말해 엄흥도와 같은 태도이다. 지금 이재명 정부는 그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축적된 ‘한’을 풀어낼 것인지, 아니면 다시 쌓이게 할 것인지의 시험이다. 그 시험을 통과하기를 기대한다. 지금 이 사회의 ‘단종앓이’를 치유할 엄흥도의 역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정부의 책임이다. 결국 그것을 감당할 주체는 지금의 이재명 정부이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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