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2016년 7월 총리 자리에 올랐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사태를 책임지고 사퇴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의 뒤를 이은 것이다. 영국에서 여성 총리가 탄생한 것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이후 26년 만이어서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총리로 취임하기 전에는 내무장관으로 재직했다. 내무장관 시절만 해도 메이 총리는 대표적인 브렉시트 반대파였다. 유럽연합(EU)에 남는 게 이익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지 3주밖에 안된 시점에서 이브렉시트 정국을 하루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브렉시트 쪽으로 선회하는 쪽을 택했다.
메이 총리는 영국 남부의 이스본에서 성공회 목사의 외동딸로 태어나 옥스퍼드대에서 지리학을 전공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에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딛었다. 이어 민간기업에서 금융 컨설턴트로 12년간 일하면서 런던의 기초의원을 지냈다. 1997년 런던 서부의 버크셔의 한 선거구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야당 시절인 1998년부터 지금까지 내각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2년에는 보수당 최초 여성 당 의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2010년 보수당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내무장관에 올랐고 6년간 재임하면서 최장수 내무장관 재임 기록을 세웠다. 이민과 치안, 안보와 관련한 강경파로, 내무장관 시절에도 관련 대책을 담당했다. 총리 후보 가운데 높은 지지율을 얻은 배경이기도 하다.
메이 총리는 리스본 조약 50조에 따라 EU 측에 탈퇴를 공식화한 뒤 2017년 3월부터 본격적인 브렉시트 협상에 나섰다. 안정된 정권 기반을 확보해 브렉시트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총선 카드를 꺼내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보수당이 과반수 의석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이 리더십'에 대한 피로감으로 총리 사퇴 압박론이 불거지자 작년 11월 EU와 극적으로 브렉시트 합의안 초안을 마련했다. 초반에는 하드 브렉시트(완전한 EU 탈퇴) 전략을 강조했었다. 하지만 교착 상태가 계속되자 EU의 요구사항을 상당 부분 수용, 지나치게 저자세로 양보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메이 총리는 노딜 브렉시트(영국이 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이탈하는 것) 우려를 해소하려면 의회가 합의안을 승인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영국 의회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제정한 EU 탈퇴법에 따르면 정부는 비준동의 이전에 EU와의 협상 결과에 대해 하원 승인 투표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 하원은 합의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사실상 브렉시트의 마지막 단계였던 승인 투표에서 합의안이 부결되면서 영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은 더욱 높아졌다. 메이 총리도 '혼돈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다시 한 번 정치 생명에 시련을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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