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진일보, 나를 깨고 나아가다
류영모는 제나에서 얼나로 나아간 깨달음을 '파사일진(破私一進)'이라고 했다. 나를 깨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의미다. 송나라 도원의 불교기록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수행묘리를 기독교 사상에 적용한 것이다. 백척의 꼭대기에 올라가 더 디딜 수 없는 허공에서 한 걸음 내딛는 백척간두진일보는 현재의 상태(삶)를 감연히 포기함으로써 큰 깨달음을 얻어 영생으로 나아간다는 동양적 화두(話頭) 수행이다.
1941년 11월 28일 류영모는 자신이 산 날의 숫자인 18888일을 '파사(破私)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1은 '하나'이며 '이(사람)'라는 점에서 나를 가리킨다. 8888은 '팔사(八四)'로, '파사'로 음역했다. 즉, 18888은 '내가 파사를 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18888, 내가 나를 깬 그날
이로부터 37일 만인 1942년 1월 4일(제18925일) 새벽 치통으로 괴로워하는 아내를 위해 기도를 하다가 신앙의 큰 희열을 경험한다. '파사일진'이 흐름을 타고 온 것이다. 파사(破私)가 한달여 만에 일진(一進)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일진'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나(一)'의 품에 안겨 드디어 합일하는 것이기도 하다.
류영모의 말을 들어보자. "기도 중에 모든 허공계가 마무(魔霧, 사탄의 안개, 지독한 안개) 중인 것을 알고 저 안개를 없애기 위해서는 성신(聖神)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게으름과 족한 줄 모름에서 몸은 사람의 짐이 되고 육체가 병의 보금자리가 된 것을 보고 게으름을 제치고 모든 미련을 떼어내고 앞만 향해 내달려 가야 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을 것을 지키고 있다가는 죽음에 그칠 것이요, 나중에 죽을 것을 거두어서 앞의 삶에 양식으로 제공하는 것으로만 몸이면 성한 몸이나 생명을 여는 몸이 될 것을 보았습니다. 제칠 것은 제치고 떨칠 것은 떨치고 내칠 것은 내쳐가는, 이기는 목숨 앞에는 병도 감히 침범치 못할 것이오 침범된 것도 퇴각격멸할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그는 사탄의 안개를 걷을 성신을 만났다. 예수를 재발견한 것이다. 파사일진의 기쁨을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로 남겼다.
"나는 시름 없구나, 이제부턴 시름 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여 님이 나를 맡으셨네. 님이 나를 가지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거라곤 다 버렸네. 죽기 전에 뭘 할까도, 남의 말을 어쩔까도, 다 없어진 셈이네. 새로 삶의 몸으로는 저 말씀을 모셔 입고,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가 나타나고, 모든 행동에 선을 그으니 만유물질이 늘어섰다. 온세상을 뒤져봐도 거죽에는 나 없으니, 위이무(位而無, 자리는 있으나 존재는 없음)인 탈사아(脫私我, 나를 벗어남)되어, 반짝 빛(요한 1장4절), 님을 만난 낯으로요 말씀 바탕한 빛이로다. 님 뵈옵자는 낯이요, 말씀 읽을 몸이라. 사랑하실 낯이요, 뜻을 받들 몸이라. 아멘."
류영모는 이날 "아버지 품으로 들어갔다"고 밝히면서 중생일(重生日)로 선언한다. 1월 4일을 요한복음 1장4절(생명은 말씀에 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과 결부시켜 그 의미를 돋을새김한다.
류영모는 요한복음 7장52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에서 느낀 바 있어 북한산 비봉으로 들어갔다. 문수계곡에서 나오는 물과 비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주친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다석일지 제4권 633쪽).
요한복음 읽은 뒤 북한산 비봉으로
그는 요한복음의 그 이후 구절을 거듭 읽었다. (예수를 비난하던 무리들은 날이 저물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7장53절)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셨다(8장1절). 류영모가, 그의 거듭남이 예수의 깨달음을 얻은 것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비봉은 '류영모의 감람산'이었다.
류영모의 '파사'와 '중생'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었다. 40대 후반부터 그의 내면에서 꾸준히 한 줄기의 파도를 이루며 그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49세 때 호암 문일평의 죽음(1939년 4월 3일)으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처럼 서 있는 죽음을 느꼈다. 인간 일생이 생선토막 같은 삶. 그 끝에 있는 죽음은 무엇인지를 궁구했다.
그 아뜩한 현기증 가운데 50대를 맞았고 이듬해인 1941년 8월 5일 집 부근의 아카시아나무에서 가지치기를 하려 삼각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낙상 사고를 당했다. 2주일간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허리뼈의 참담한 고통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죽음이 가장 새로운 세계일 수 있겠다. 고통과 쾌감이 실은 한 맛인 것을 고통으로만 알고 있어서 크게 겁먹고 있는 수가 많지 않은가. 사람의 살림이 대부분 몸뚱이의 자질구레한 일이다. 하느님의 성령과 함께하는 참된 삶을 살려고 할 때 몸뚱이란 마침내 큰 짐이요, 감옥이요, 못된 장난이 아닌가."(성서조선 152호 '기별')
그의 깨달음은 해안선을 벗어나는 '육리(陸離)'라는 개념으로도 전개된다.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바로 찬란한 육리라는 것이다.
"해안선(海岸線)을 떠난다는 육리라는 말은 영광이 찬란하다는 말이다. 인생의 종말은 찬란한 육리가 되어야 한다. 난삽(難澁)한 인생의 마지막이 육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야 한다."(1956)
육리는 바로 '육리(肉離)'가 아닌가. 몸을 떠나는 것은 찬란하다. 류영모는 "나를 죽이자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이 오는 것을 체험하였다. 진리의 성령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고 했다. 파사일진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류영모는 지구를 어머니 뱃속이라고 표현했다. 이 배를 버리고 다른 배를 타는 것. 이것이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 사람이 60년 전에 어머니의 배를 차고 나와서 지금 지구라는 어머니(地母) 뱃속에 있다. 머지않아 이 배를 버리고 다른 배를 타게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1956)
"죽음이란 어린이가 만삭이 되어 어머니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지구는 어머니 배나 마찬가지다. 어린이가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있듯이 사람이 백 년 동안 지구에 있다가 때가 되면 지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우리는 다시 신정(新正)을 맞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머니 뱃속에서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의 아들(얼나)이 충실하게 무럭무럭 자라 열 달이 차면 만삭공(滿朔空)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아들이 자라기 위해서는 식색(食色)을 절제하면서 하느님께 기도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입은 묵혀 두고 맘을 비워 둔다."(1957)
류영모의 '지모(地母, 지구어머니)론'은 1972년 영국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1919~)이 제기한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을 떠올리게 한다. 지구는 약 38억년 전에 스스로 거대한 생명체로 태어났으며, 각각의 생물과 무생물을 이용해 지구 환경의 생존 조건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생명체의 개별성에만 주목을 했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지구생명체'가 스스로 활동하며 죽지 않는 생을 영위해 가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가이아'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으로, 스스로 지구 환경을 치유하는 항상성(homeostasis) 기능을 지닌 존재를 상징한다.
가이아는 종교계에도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심상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떤 잠재의식을 이 가이아가 표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러브록은 성모 마리아를 가이아로 해석하기도 했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기를 낳은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가이아를 구성하는 존재들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나가는 그 생명체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일부이며 우리를 영생케 하는 존재라는 류영모의 말은 가이아 가설에서 봐도 오류나 모순이 없다.
중생 이후 성령이 임한 류영모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쳤다. 제자 김교신은 스승의 그런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선생은 보는 바와 같이 원고를 손수 지니고 오셨다. 흥분의 홍조를 띠시고 넘치는 기쁨을 누르지 못하시면서 오신 뜻을 말씀하셨다. '이 사람의 원고를 성서조선 잡지에 실어주신 것이 고마운 때도 있었고 미안한 때도 있었으나 이번 원고만은 반드시 실어주셔야 합니다' 하면서 내놓으신 것이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글이었다. 38년이라는 말과 얼굴 가득 넘쳐흐르는 환한 빛을 번갈아 보면서 우리는 한동안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하고 오직 어안이 벙벙하였다."(김교신, 성서조선 157호)
그가 내면에 넘쳐오르는 희열을 표현한 것은 가득 찬 성령의 기운이었을 것이다. 제자 김흥호는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은 가끔 강의를 하다가도 수무족도(手舞足蹈)로 둥실둥실 춤을 추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류영모는 왜 얼나로 거듭난 영성체험을 간증한 글을 들고 김교신에게 달려갔을까.
김교신 성서조선에 '파사의 간증' 실은 까닭
류영모가 김교신에게로 달려간 까닭은 동지애나 후학에 대한 존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통신앙을 안고 살았던 김교신에게 스스로가 추구했던 '참의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간증하러 간 것이 아닐까. 예수는 성령을 받고 태어나, 광야의 시험과 십자가의 대속을 거쳐 인자(人子)임을 인정받았다. 파사(破私)의 과정이 뚜렷하다.
그러나 이후의 기독교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재확인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체계가 구성된다. 신과의 대면은 나를 극복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불변의 믿음을 증명하는 일상신앙에 가까웠다. 그 믿음의 일상화를 주도한 것이 교회라는 매개이기도 했다. 류영모는 그 정통에서 벗어나왔고 입문 38년 만에 예수와 같은 '파사일진'을 경험한 것이다. 성서조선은 당시 조선 기독교의 '정통'을 상징하는 신앙체계의 중심이기도 했다. 김교신과 성서조선에 비정통 신앙의 '승전보'를 알리는 일은 류영모의 종교적인 신념이 옳음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100마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이보다 중요한 증거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류영모의 글을 읽고 난 뒤, 김교신은 그의 뜻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그 글 속에서 류영모가 예수를 주(主)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 어른이 어찌 예수를 주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성서조선 동인들은 류영모가 그들의 정통신앙으로 돌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주(主)'라고 부른 것은 하느님이 보내신 얼의 나였다. 예수의 마음속에도 들어왔고 류영모의 마음속에도 들어온 바로 그것이었다. '주'는 말씀이며 성령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정통신앙에서 예수를 가리켜 구세주라고 말하는 한정적 의미의 '주'가 아니었다. 류영모의 승전보를 오히려 항복문서처럼 오해한 어리석음이었다.
그는 이렇게 예수('우리 아는 예수')를 노래하고 있었다. "예수는 믿은 이, 아버지 아들인 성령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고저 선악 생사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 한뜻 계신 믿은 이, 없이 계심 믿은 이." 예수의 길과 류영모의 길이 일치하고 있는 것을, 김교신은 몰랐던 것 같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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