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기울어진 정치 운동장 …조정 시간입니다

[이재호 논설고문]
[이재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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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새판짜기 II] ⑥
 
탄핵에 이어 치러지는 6·3 대선은 조기대선 특유의 취약점을 드러낼 것 같다. 후보들을 검증할 시간이 충분치 않고, 신인들의 정치권 진입이 어려우며, 공약과 정책이 미완의 상태로 유권자들에 던져질 수 있어서다. 힘들게 세운 민주적 리더십의 제도화(안정화)가 한 발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6일 한국 사회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입증했다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한국 민주주의가 무모한 지도자를 이긴 방식’이라는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점과 회복력이 동시에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분노한 시민이 맨 손으로 군대를 막아서면서 국회가 계엄해제 투표를 할 시간을 벌었고, 나중에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NYT가 1980년대 이런 보도를 했다면 많은 국민은 자부심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전후(戰後)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 달성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한 지 오래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른바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상생의 균형을 이루는 게 바람직한 민주주의이고 정치발전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이제 곧 한 표를 행사할 대다수 유권자들의 심정 또한 같을 것이다. 조기대선을 앞둔 소회가 그렇다. 정말, 윤 전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국민의힘(국힘) 일각에선 이번 조기대선에 후보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탄핵 때문에, 더 정확히는 탄핵 찬성으로 인해 치러지게 된 대선인데 탄핵에 반대해온 사람들이 무슨 명분과 염치로 후보를 내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국힘은 2개의 기둥 위에 서 있었다. 하나는 ‘(근거가 확실치 않은) 이재명 유죄론’, 다른 하나는 ‘탄핵 반대’였다. 그 두 기둥이 모두 무너졌다. 
 
흔히 선거는 프레임(frame)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국힘은 이제 어떤 프레임으로 대선을 치를 것인가. 여전히 탄핵 반대인가, 아니면 이제라도 탄핵 찬성으로 돌아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또다시 한국 정치의 특질 중의 하나인 국민의 관용과 건망증에 기대어 두리뭉실하게 적당히 넘어갈 것인가.
 
국힘 일각에선, 전 국민을 상대로 ‘국민후보’를 추천받자는 의견도 나온다. 솔직히 국힘 의원들이 그런 결기라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탄핵 반대를 외치면서 윤 전 대통령과의 유대를 과시하려고 경쟁하듯 몰려다니던 다선 중진의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지금도 확신한다면 이번 대선에서 큼지막한 윤 전 대통령의 사진이라도 한 장 들고 나와 응원이라도 할 텐데 과연 그럴 의원이 있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한동훈 전 대표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그를 지지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비상계엄이 선포됐던 12월 3일 밤 누구보다도 먼저 계엄 선포가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국민과 함께 이를 막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더 큰 불행을 막았다. 이건 누구도 부인 못할 팩트다. 신지호 전 국힘 전략기획부총장은 7일 한 유튜버와의 인터뷰에서 “한동훈 아니었으면 국힘은 내란 동조당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 역시 같은 생각이다.

'탄핵당' 이미지 넘을 프레임이 없다
 
그럼에도 한동훈에 대한 국힘과 여권 내부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윤 대통령 재임 당시 그와 한동훈과의 의견 충돌의 여파 때문일까. 그렇다면 누구랄 것도 없이 너무 옹졸하다. 아니면 시기 질시, 뭐 그런 것일까. 또는 과거 박근혜 탄핵 때의 ‘배신자’ 프레임이 낳은 트라우마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국힘 내부가 알게 모르게 그만큼 극우화됐다는 증거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국힘 내부의 이 같은 갈등부터 해소되어야 한다. 그게 최우선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국정 운영의 한 축으로서 중도층까지 아우르는 범보수 진영의 대표자가 되기는 어렵다.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민주당은 국힘을 싸잡아 ‘탄핵 반대당’ 또는 ‘극우’로 몰아붙일 게 뻔하다.
 
요즘엔 ‘극좌’의 시대가 저물고 ‘극우’의 시대가 오기라도 한 것 같다. 누구든 ‘극우’로 몬다. 이승만 박정희를 지지한다고 불문곡직 극우인사가 되기도 한다. ‘극우’는 파시즘을 연상케 해 선거에서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애국시민과 극우는 어떻게 다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웬만한 유권자들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다 안다. 국힘에서 대선 출마 의사를 비친 10여명 중 선두를 달리는 인사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장관(전 경기도지사)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국힘이 정통 보수정당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선거 프레임을 제대로 짜야 한다. 긴말이 필요 없다. 국힘의 프레임은 ‘미래’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서 미래로!’가 제1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 한 당외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빙상경기장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를 백일장으로 쓰라”고 했다. 그 정도로 싹 바꿔야 한다는 얘기였다.

너무 한쪽 편을 든다고 할지 모르나,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지금 판세로는 전망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어떤 지지율 조사에서도 30% 이상을 넘어 확고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거기에 비춰 국힘은 당내 선두라는 김문수 전 장관조차 10%대 초, 중반이다. CBS 노컷뉴스가 지난 4∽5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18세 이상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한 후보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지지율이 12.7%, 홍준표 9.5%, 한동훈 7.6%, 오세훈 5.2%, 이준석 3.1% 순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런 추세로 굳어진다면 거대한 입법권력의 폭주가 또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건 누구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의회가 압도적 다수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여야가 비슷한 상태에서 경쟁하도록 돼 있었다면 탄핵 같은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호 견제와 균형이 의회정치는 물론 세상을 경영하고 함께 살아가는 한 지혜가 아닌가 싶다.
 
대통령 임기부터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국회도 양원제로 바꾸고, 국무총리도 국회에서 뽑고, 일제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행정체제를 디지털시대, AI 시대에 맞게 축소하고 간소화하자는 제안부터라도 즉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개헌’은 당과 정치의 프레임을 미래에 둬야 한다는 당의 방침과도 맞는다. 개헌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그런 체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럼에도 민주당 지도부는 개헌에 부정적임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8일 개헌에 관련해 “지금은 내란 종식에 전념할 때다. 자칫 개헌 논의를 앞세우다가 개헌이 블랙홀이 돼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말 것”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정치는 결국 '국리민복'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개헌 얘기가 나오자 “개헌, 개나 줘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우원식 국회의장의 개헌논의 제안에는 “의장질 그만하라”고까지 했다. 개헌 주창자를 겉과 속이 다른 ‘수박’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아무리 정치판이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를 하는 이유가 뭔가. 수사(修辭)는 버리고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국리민복(國利民福) 아닌가. ‘87년 체제’를 바꿔 그에 맞는 국리민복의 시대를 열자는데 왜 부정적인가. 국힘의 한 당외 인사는 앞으로 당의 구호를 이렇게 바꾸는 게 낫다고 했다. “오직 민생, 오직 개헌!”. 또는 앞뒤를 바꿔서 “오직 개헌, 오직 민생!”으로 하자는 일종의 아이디어였다. 국힘 당원은 아니지만 그런 심정으로 정치하자는 일종의 자기최면이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영국의 심리학자 스티브 테일러가 쓴 <불통, 독단, 야망>(Disconnected ‧ 21세기북스 2025년) 이란 책을 읽었다. 세상과 연결되지 않고 차단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마키아벨리즘, 나르시시즘, 병리주의로 가득 차있다고 한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 노력의 열매를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잔인해서 때로는 사이코패스와의 구별도 힘들다고 한다. 누구든 우리 정치인들의 야망이 그런 쪽으로 발현되지 않았으면 해서 한 줄 덧붙인다. 바야흐로 꿈꾸는 잠룡들의 시간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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