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관세 폭격과 미·중 패권 경쟁, 글로벌 공급망 불안 등 복합 위기에 맞닥뜨린 국내 주요 기업들이 오너 경영 체제 강화에 나서고 있다. 총수가 직접 리스크 완화와 새로운 사업 기회 발굴을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조직 개편과 인사에도 속도를 내면서 '친정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모습이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재계 맏형 격인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은 글로벌 빅테크와의 공급 계약을 잇따라 따내고, 사실상 중단됐던 대형 인수합병(M&A) 추진도 재개하는 등 경영 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재계는 조용한 경영자로 알려진 이 회장이 현장형 총수로 변신한 데 주목한다.
이 회장은 사법리스크 해소 직후인 지난 7월부터 연이은 해외 출장길에 올라 한·미 관세 협상을 측면 지원하는 것은 물론 미국 빅테크와의 비즈니스 미팅도 지속했다. 이 기간 테슬라의 차세대 인공지능(AI)칩을 수주한 데 이어 애플 이미지센서 생산 계약도 맺는 등 성과를 냈다. 독일 냉난방공조(HVAC) 전문 기업인 플랙트 그룹 인수, 미국 오디오사업부 인수 등 M&A도 성사시켰다.
지난달에는 방한한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회동하면서 반도체 관련 협업을 이끌어냈고, 이달엔 미국 신용카드 시장 진출을 추진을 가시화하는 등 사업 영역 확대에도 적극적이다.
최근에는 삼성 그룹의 핵심 조직인 사업지원TF를 '사업지원실'로 격상했다. 재계에선 이 회장이 그룹 컨트롤타워를 재정비하며 '원 톱' 체제를 강화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HD현대그룹도 오너십 강화 신호탄을 쐈다. 30여년 넘게 이어 온 전문경영인 체제를 종료하고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오너 3세 경영'을 본격화한 것이다.
한·미 조선 협력(마스가) 프로젝트 성공을 진두지휘하고 미·중 해상 패권 경쟁에 적극 대응하기 위한 오너 리더십 강화 차원이다. 최근 글로벌 조선업 호황에 전력 인프라 사업까지 날개를 달며 그룹 사세 확장에 가속이 붙을 전망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SK수펙스추구협의회]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내년 사업 전략의 신속한 수립과 조직 안정화를 위해 예년보다 한 달 빨라진 10월에 사장단 인사를 단행했다. 현장 중심의 실행력과 기술 경쟁력 제고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주문도 덧붙였다.
앞서 SK그룹은 오너 부재로 경영에 큰 차질을 빚은 바 있다. 최태원 회장은 2012년 횡령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징역 4년이 선고됐다. 이 기간 그룹은 STX에너지 인수 포기 등 과감한 투자 결정에 제약을 받았고, 2013년 영업이익은 8조970억원에 그쳤다.
2015년 8월 최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뒤 상황은 달라졌다. M&A와 투자는 물론 그룹 체질 개선에 속도를 내면서 그해 영업이익이 10조6726억원으로 늘었다. 최 회장이 인수를 밀어붙인 SK하이닉스는 역대 최대 실적을 잇따라 경신하며 최근 시가총액이 400조원을 돌파했다.
재계 관계자는 "위기 국면에서 총수가 직접 나서고 책임 구조가 더 명확해지는 경영 모델로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