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혁신을 한국에 도입하겠다며 야심차게 나섰던 정부의 벤처기업 활성화 정책이 오히려 '좀비기업'을 양산시켜 창투사와 벤처캐피털(VC) 업계만 배불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건전한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저질 체력의 특례 상장 기업을 증시에 입성시켜 개인투자자들만 골탕먹고 있다는 얘기다. 금융당국은 상장 폐지 간소화 카드를 꺼내 '좀비기업' 퇴출 수순에 나설 계획이다.
2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60개 기업이 관리종목으로 지정됐다. 2019년 한 곳, 2020년 3개사, 2021년 2022년 각각 3개사에서 지난해 30개사로 관리종목은 급증세를 나타냈다.
거래소에 따르면 관리종목 지정은 상장폐지 전 단계로 불린다. 감사의견 거절·관리지정 종목후 사유 미해소 등으로 올해 상장폐지된 기업 수는 유가증권시장 2개사, 코스닥 17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3년(유가증권시장 3곳, 코스닥 17곳) 전체 상폐 건수와 비교했을 때 이미 1개사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몇 년 사이 금융당국이 상장 심사 문턱을 대폭 낮추면서 재무건전성이 좋지 못한 기업들도 특례상장으로 증권 시장에 입성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파두 사태'처럼 증권 시장이 질적으로 악화돼 관리종목 지정도 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한계기업이 많아진 이유는 벤처캐피털(VC)업계의 입김 때문”이라며 “투자한 기업이 상장이 돼야 더 높은 가격으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VC업계의 특성 때문에 좀비 기업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VC 업계는 IPO 특례 상장확대를 말하고 다니지만, 엑시트 한 뒤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이 문턱을 크게 낮춘 배경에는 중소벤처기업부의 벤처기업 활성화 정책이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해부터 중소벤처기업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기술특례상장 설명·상담 로드쇼'를 진행하는 등 비상장기업의 재무건전성과 상관없이 성장가능성에 집중하며 지원에 나섰다.
지난해 금융위는 고금리와 경기둔화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3년~7년 미만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에 총 10조5000억원의 자금을 투입시켰다. 당시 주식시장 침체기로 기업들의 IPO 철회가 빈번해지면서, 금융위는 중기벤처부와 손잡고 세컨더리 투자 펀드 제도를 확대해 벤처투자자들의 빠른 자금 회수를 돕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같은 금융당국의 기조는 이전 정권부터 형성됐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래 벤처투자 금액은 5년 만에 3배 이상 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투자건수도 2017년 상반기 1033건에서 2021년 상반기 2367건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정부 정책에 따라 중소기업들의 특례상장 건수는 2020년 25개, 2021년 31개, 2022년 고금리 영향에 28개로 소폭 감소했지만 지난해 다시 35개까지 늘었다. 올해에는 특례상장 기업들의 재무건전성이 강조되면서 27곳으로 줄었다.
이렇게 최근 5년 동안 특례상장 제도를 통해 증시에 입성한 상장사 중 63%는 현재까지 공모가를 밑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곳이 상당수라 주가가 오를 수 없는 구조다. 초기에 투자한 VC만 투자금을 챙기고 청약에 참여한 투자자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다.
밸류업 정책과 별도로 특례상장 기업의 재무건전성 악화를 의식한 거래소는 특별심사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심사 인력 확충, 산업별 전담 심사팀 운용 등 조치를 내렸다. '파두 사태'를 비롯해 당국의 '좀비기업' 상장 유지 지적이 일자 심사 기간은 단축하되 더 꼼꼼히 보겠다는 의도다.
금융위원회 역시 '좀비기업'의 상장폐지 기간을 기존 4년에서 2년으로 단축하는 안에 대해 연내 결론 짓기로 했다. 당국에 따르면 코스닥 상장사의 심사 절차는 3심제에서 2심제로 단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상장폐지 절차 장기화로 인한 투자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심사 절차 개선을 연내 추진한다”면서 “구체적인 방안은 추후 결정해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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